'힙지로(힙하다+을지로의 합성어)'로 유명해졌지만, 을지로의 상징은 '인쇄 골목'이다. 인쇄용지를 운송하는 삼륜차, 지게차, 화물차가 골목골목을 바삐 누빈다. 골목 곳곳에서 잉크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가업을 이어 인쇄골목을 10년째 지키고 있는 서동열 유림문화 대표는 28일 아시아경제 인터뷰에서 을지로에 대해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한 때 '직장인'이었던 서 대표는 2014년부터 장인어른이 하던 인쇄소로 출근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이점을 크게 봤다고 했다. 인쇄업이라는 전통을 잇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물론 바쁘게 돌아가는 인쇄업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워라벨은 사라졌다. 퇴근 후 귀가했다가 다시 일터로 나와 밤을 지새우는 날이 한 달에 두어번이다. 꼭두새벽부터 시작되는 인쇄업 특성상, 아침에 단잠을 자는 것은 꿈도 못 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하는 방향과 고민도 달라졌다. 서 대표는 "처음 2년은 업무를 배우기 위해 힘들었지만 변화 중인 인쇄업을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 생각하면 설레였던 순간도 있다"고 전했다.
그가 있는 동안 을지로 상권은 많이 바뀌었다. 인쇄업이 사양산업이라며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가업을 잇고자 하는 2세대들의 유입도 많아졌다. 특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주변에 아크릴 업체가 많이 생겼다. 인쇄 공장이 사라지고 카페나 베이커리, 레스토랑 등도 생겼다.
서 대표는 "빈티지하고 힙한 가게가 많아졌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게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을지로 인쇄골목의 생존 위기를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시가 '서울 녹지생태 도심 재창조' 전략의 일환으로 을지로 일대를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하고, 녹지와 고층빌딩으로 재정비하는 개발 사업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을지로 인쇄골목은 600년 명맥을 이어온 활자 인쇄 문화의 역사가 남아있는 곳이다. 중구 충무로, 을지로 일대에는 약 5000여개의 크고 작은 인쇄업체가 밀집돼 있다. 고층 건물이 들어오게 되면 상권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인쇄골목'이라는 상징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지난 2월에는 이에 반대하는 인쇄인이 모여 '생존권 수호를 위한 총궐기대회'(서울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인쇄인생존권수호대책위원회, 청계천을지로보호연대 주최)를 통해 생존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서 대표는 "을지로의 장점은 빠르고 저렴하다는 것이다. 인쇄 전 과정을 아우르는 업체가 모여있기에 가능한 것인데 문을 닫거나 떠나는 업체가 많아지게 되면 인쇄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상권이 무너지고 생존권이 박탈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쇄 과정은 꽤 복잡하다. 인쇄만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책자 종류 외에도 화장품 케이스, 다양한 제품의 박스 등에도 후가공이 적용된다. 인쇄 골목을 채운 약 5000개 인쇄소는 인쇄, 코팅, 실크, 제본, 도무송, 접착 등 다양한 과정을 하는 업체로 이뤄져 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한 과정이라도 빠지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는 "인쇄업은 협업이 안 되면 완성이 안 되는 구조"라며 "상권이 모여있기에 빠르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지만 흩어지면 장점만 잃는 게 아니라 생존권도 잃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쇄골목이 낙후된 곳이어서 개발해야 한다는 입장도 이해하지만 을지로는 인쇄소가 밀집된 중심 상권 아닌가. 주거 환경을 위해 600년 역사를 없애는 건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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