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간 만에 방전되는 오래된 보조배터리 같았어요. 1인분의 제 역할을 다 못하는 거죠. 보조배터리는 충전단자라도 있지, 나는 어디서 어떻게 충전하면 되는지를 몰랐어요."
한동희 씨(28·경기 의정부)가 몸에 이상이 있다고 느낀 건 2021년 초.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업무가 한 씨에게 밀려들었고 야근의 연속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신발만 겨우 벗은 채로 현관에 쓰러져 잠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까지 갈 기력도 없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겨우 씻고 다시 출근. 카페를 가거나 인기 드라마를 챙겨보는 게 삶의 낙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마저도 노동처럼 느껴졌다. 주말엔 시체처럼 잠만 잤다. 자취방도 엉망이 됐다. 6평짜리 좁은 원룸이라 마음먹고 정리하면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빨래한 옷과 입은 옷이 바닥에 뒤섞여 널브러져 있고 침대에도 옷이 가득해 몸을 반만 걸친 채로 잠들 정도였다.
한 씨도 그랬다. 부산에서 상경해 직장을 다니는 한 씨에게 "힘들면 내려오라"는 부모님의 걱정은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이 되지 못했다. 한 씨는 "위로받지 못하니 나중에는 힘들어도 잘 지내는 척만 하게 되더라"고 토로했다. 고립 청년들에게도 가족과 친구는 있다. 하지만 속을 털어놨다가 이해받지 못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쉽사리 고민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한 씨의 고립도 그렇게 시작됐다.
언젠가부터 이유도 없이 불쑥불쑥 화가 났다. 일과 관련 없는 일상 대화, 반복되는 일 처리 등 직장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일들이 분노의 이유가 되곤 했다. 스트레스를 푸는 법을 몰랐다. 한 씨는 "회사에서 소리를 지를 순 없으니까 벽을 치기 시작했다"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아픈데도 계속 벽만 쳤다"고 말했다.
한 씨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인생이었다. 남들은 취업난에 아르바이트도 구하기 힘들다는데 대학 졸업 후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바로 취업해 제 밥벌이를 했다. 고립·은둔 청년들이 취업과 대인관계 등에 의지와 노력이 부족하다는 편견 역시 한 씨에겐 해당하지 않았다. 모난 데 없이 사교적인 한 씨에게 직장 동료들은 "정말로 MBTI가 I(내향형)냐"고 되묻곤 했다.
결국 한 씨는 일 년 만에 퇴사를 택했다. 6개월의 이직 준비 기간 동안 한 씨의 삶은 은둔에 가까웠다. 침대는 늪과 같았다. 잠시 쉬려고 누우면 파묻혀 일어나기 힘들었다. 목, 허리 관절을 누가 뽑는 것처럼 세게 잡아당기고, 몸을 위에서 세게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직장생활에 지쳐 진이 빠진 한 씨에게 위아래서 잡아당기는 중력을 이기고 일어설 기력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늦잠이라곤 자본 적 없었던 한 씨는 이때 처음으로 하루를 잠으로 다 보내는 시절을 겪었다고 했다.
"오늘은 나가야지, 나가서 죽치고 있더라도 나가야지 싶어서 씻고 옷도 갈아입었는데 그 행위 자체가 너무 피곤한 거예요. 그래서 그 상태로 다시 침대에 누워요. 그러다 보면 해가 져 또 못 나가는 거죠. 해가 지면 내가 보호받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겁났어요.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날 찾는 사람이 없겠다 싶었어요. '만약 발견이 되더라도 얼마나 지나야 발견이 될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일주일에 하루도 못 나간 적이 많아요."
그러다가 밤이 되면 일어나 방을 쓸고 닦았다. 외출도 하지 않는데 매일같이 옷을 빨고 갰다. 욕실은 락스 칠까지 해가며 박박 닦았다. 손이 계속 건조해서 틀 정도였다. 이렇게라도 몸을 혹사해야 잡생각 없이 기절하듯 잠들 수 있어서였다. 한 씨는 이때 자신의 행동이 일종의 생존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어쩌면 저 스스로 살고 싶어서 했던 행동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한 씨는 결국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옆에 도와줄 사람이 있고 고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고 무너졌던 자존감도 회복할 수 있었다.
현재 한 씨는 재취업에 성공해 다시 직장을 다니고 있다. 2022년 4월부터 시작한 직장생활은 벌써 3년 차에 접어들었다. 한 씨는 현재 자신이 중요한 사람, 하나의 조직에서 필요한 존재라는 것에 상당한 삶의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힘들 때 극복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도 키우는 중이다. 그는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 받을 때도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며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에 주변에서 야근하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나서서 할 정도"라고 바뀐 삶의 태도에 관해 설명했다.
다만 아직도 한 씨에게는 '언제든 다시 고립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남아있다. 월 1~2회 정신과 상담을 병행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 씨는 "여전히 언제 멈출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기 때문에 내가 마련한 최소한의 장치"라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제든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나의 외로움·사회적 고립 위험 정도를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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