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맥주 업계 1호 코스닥 상장사인 제주맥주 가 상장 3년 만에 매각된다. 상장 당시 제주 지역 정체성을 강조한 맥주 등 차별화된 제품과 사업모델로 국내 주류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양적 성장에 집중한 탓에 편의점 맥주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적자만 기록하다 주인이 바뀌게 됐다.
2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제주맥주는 자본총계가 자본금보다 적은 자본잠식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맥주는 지난해 말 기준 자본 잉여금이 7억6600만원에 그친 반면 누적 결손금은 867억원에 달한다. 해마다 이익을 내고, 이익 중 배당금을 제외하고 이익 잉여금을 쌓아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제주맥주는 수년간 순손실이 이어지며 2021년 501억원, 2022년 742억원, 지난해 867억원으로 마이너스 이익 잉여금만 쌓였다.
제주맥주는 2021년 5월 기업공개(IPO) 당시 투자설명서를 통해 2025년까지 추정 실적을 밝혔는데, 2023년 매출액 추정치는 1147억원, 영업이익은 219억원이었다. 하지만 실제 실적은 이와는 큰 괴리가 있다. 지난해 제주맥주의 매출액은 224억원으로 추정치의 19.1%에 그쳤고, 영업손실은 110억원으로 영업이익은커녕 한 번도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손실만 냈다.
적자가 계속되는 등 재무상태가 악화하면서 제주맥주는 지난 19일 최대주주인 엠비에이치홀딩스(14.62%)와 문혁기 제주맥주 대표이사(0.17%)가 보유한 주식 864만주와 경영권을 1주당 1175원에 총 101억5600만원에 더블에이치엠에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인수에 나선 더블에이치엠은 맥주 사업과는 무관한 서울 성동구 소재 자동차 수리·부품 유통업체로 지난해 매출액은 26억원, 순이익은 3억2300만원을 기록했다.
이번 계약에 따라 더블에이치엠은 매매대금의 10%인 10억원을 계약금으로 엠비에이치홀딩스에 지급했고, 중도금 51억원은 다음달 15일, 잔금 41억원은 임시주주총회 개최일인 5월8일 하루 전까지 납입할 계획이다. 제주맥주의 경영권은 임시주총에서 잔금 지급과 함께 더블에이치엠이 지정한 이사와 감사를 선임한 다음 더블에이치엠으로 넘어간다.
제주맥주는 2021년 5월 국내 수제맥주 업체로는 처음으로 한국거래소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상장 당시 적자 기업이 증시에 입성할 기회를 주기 위해 2017년 도입된 이른바 '테슬라 요건(이익 미실현 기업 상장 특례)'으로 증시에 데뷔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상장 이후 영업 손실이 계속됐고, 주가 하락까지 이어지면서 결국 경영권이 넘어갔다.
다만 이번 매각으로 문 대표는 목돈을 쥐게 됐다. 지분율 54.5%로 본인이 최대주주인 엠비에이치홀딩스와 제주맥주의 지분 매각이 마무리되면 문 대표는 55억원 이상의 현금을 챙기게 된다.
제주맥주가 업계 최초의 상장사라는 상징성을 고려하면 이번 매각은 수제맥주에 대한 시장의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업계 2위 규모의 세븐브로이맥주도 내년 코스닥 시장 이전상장을 목표로 지난 1월 코넥스 시장에 상장했지만, 지난해 매출액이 전년(327억원) 대비 62.1% 감소한 124억원에 그쳤고, 영업손실이 62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면서 향후 가시밭길이 예상된다.
업계에선 국내 수제맥주 시장의 선도업체였던 제주맥주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며 시장을 주도하기보다 ‘4캔 만원’이라는 기존 편의점 시장에서 적극 편승하며 몸집 불리기에 집중한 것이 악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제주맥주는 한때 ‘제주위트에일’, ‘제주펠롱에일’ 등 제주라는 지역성을 기반으로 한 제품을 앞세워 업계에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결국 편의점 매대 밖에서도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품과 사업모델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기존 수제맥주 전문점과 펍(Pub) 등 유흥채널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수제맥주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주류유통이 가정채널로 사실상 제한되면서 마트나 편의점 등으로 판로를 개척하며 호황을 맞게 됐다. 하지만 편의점 채널은 수제맥주의 성장을 제한하고,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든 원인이 됐다. 편의점 채널의 ‘4캔 1만1000~2000원’이라는 마케팅 정책에 따라 납품단가의 상한선이 정해지면서 업체별 특색을 보여줄 수 있는 고품질의 맥주는 생산단가를 맞추기 어렵게 됐고, 납품단가를 맞출 수 있는 저풍미의 ‘콜라보 맥주’만 넘쳐나게 됐다. 개성 없는 다양성에만 집중한 결과 기성 맥주와 차이점이 모호해졌고, 다른 주종과 맞설 수 있는 경쟁력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제주맥주는 이번 경영권 매각과 함께 운영자금 마련을 위한 자본조달 계획도 밝혔다. 더블유에이치엠은 5월 말 1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통해 인수자금을 마련하고, 이후 각각 2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도 발행할 예정이다. 하지만 시장에선 의구심만 커지고 있다. 인수주체가 맥주사업과 무관한 소규모 업체인데다 수제맥주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외면과 더불어 편의점으로 판로가 종속되면서 일부 업체들은 트렌드에 대응한다는 미명하에 맥주를 만들던 생산시설에서 이제는 하이볼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제주맥주를 비롯한 수제맥주가 지금의 위기를 딛고 건강한 성장을 이뤄가기 위해선 결국 단순히 몸집 불리기에 집중하기보다는 분명한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수제맥주는 독립자본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양조장에서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방식으로 생산한다. 대형 주류기업이 생산하는 페일·라이트 라거 위주의 맥주가 아닌 맥주의 기본재료인 몰트와 홉, 효모는 물론 다양한 과일이나 허브 등을 자유롭게 사용해 양조장별로 개성있는 스타일로 맥주를 만드는 게 수제맥주의 정체성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수제맥주는 애초에 단박에 규모를 키워서 전체 맥주시장의 점유율에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 아닌 만큼 지금처럼 콜라보로 이미지 소모만 해선 흡입력을 만들어내기 어렵다”며 “브루어리별로 다양성을 살려 양조는 물론 펍 운영, 관광과 결합 등을 통해 각 지역에서 느리지만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사업을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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