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로 고속도로를 활보하며 기술의 첨단을 만끽하던 시대, 백남준은 인간이 교통수단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시대가 끝나고 정보 고속도로를 통해 전 세계로 데이터를 전송하는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디지털 시대에는 거리와 공갠 개념이 없어진다는 것을 미리 예견했다. 굵은 전선으로 연결된 64개의 TV 모니터로 이뤄진 그의 작품 'W3'(1994)는 백남준이 미리 그려낸 미래의 '정보 고속도로'였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는 백남준·윤석남·김길후 3인전 '함(咸): Sentient Beings'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세 작가의 회화·조각·설치 36점을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중국 고전 '주역'(周易)의 31번째 괘인 '함'은 예술과 사랑의 괘다. '주역'에서 31번째 괘까지는 하늘의 도리, 즉 천도, 31번째 괘부터는 사람의 일, 즉 인사에 관련된 괘라고 말한다. 즉, '함'은 만물의 화합과 기쁨을 상징한다. 영어 제목 '센티엔트 비잉'(Sentient Beings)에는 중생(衆生)이란 뜻도 있다. 호주 출신 철학자 피터 싱어가 제창한 이 개념은 인간 중심적 휴머니즘을 넘어 인간·비인간 모든 대상을 존중해야 한다고 전한다.
이처럼 전시는 '중생'의 의미를 담은 세 작가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백남준(1932~2006)의 작품은 'W3'(1994), '구-일렉트로닉 포인트'(1990), '인터넷 드웰러'(1994)가 자리한다. 'W3'(World Wide Web)는 굵은 전선으로 64개의 TV 모니터를 연결해 정보고속도로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이진명 미술평론가는 "W3의 비디오아트 장면은 인간사의 모든 이야기이자 화합을 뜻한다"며 "모두가 정보를 공유해서 아무도 소외받지 않고 얻어낸 정보를 갖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냉전 종식 후 개최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제창한 세계 화합의 가치를 기린 작품 '구-일렉트로닉 포인트'와 '인터넷 드웰러'는 인터넷 개통으로 지식정보가 보편화되면 인류가 평등한 세계를 건설할 것이라는 백남준의 믿음이 반영된 작품이다. 동아시아 여성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작가 윤석남(84)은 동물권에 대해 사유한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연작(2008)을 공개했다. 유기견 1025마리의 형상을 나무로 깎아 만들고 그 위에 먹으로 유기견을 그려 완성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사람과 동물이 동등하다는 뜻을 전한다.
윤석남은 "유기견 1025마리를 보살피는 이애신 할머니가 운영하는 경기도 파주 '애신의 집'을 방문한 후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걷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고, 그길로 하고 있던 모든 작업을 멈추고 이 작업에 착수했다"며 "유기견에 대한 애틋함과 강아지를 유기한 인간의 잘못에 대해 사죄받고 싶은 심정을 작품에 담았다"고 말했다.
그는 작업을 완성하는 데 꼬박 5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유기견 1마리를 포함해 반려견 4마리를 키운다는 작가는 "연필 드로잉만 2년, 나무 작업에는 3년의 시간이 소요됐다"며 "캐나다산 대형 원통 나무를 잘라 작업실로 가져오면 강아지 형상으로 만든 후 직접 촬영한 유기견 사진을 보며 색칠하며 작업했다"고 작업 과정을 회상했다.
현자(賢者)와 바른 깨우침(正覺)을 화두로 끊임없이 새로운 회화를 추구하는 작가 김길후(62)는 '무제'(2014)와 '사유의 손'(2010)을 통해 관객과 만난다. 작가는 "지금까지 표현주의를 통해 사람의 깊은 내면을 담아내려고 했다. 표현주의는 인간이 그림을 그리는 한 변하지 않는 만큼, 회화에 나의 표현성을 담으려고 여러 연구와 노력을 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작업을 통해 김길후의 자아가 아닌, 보편적인 자아를 그려내려고 했으며, 빠른 작업 속에서 육중한 한 획의 붓질을 통해 느낌과 깊이를 담아내려고 했다"고 강조했다. 전시는 4월 20일까지.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