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금융시장에서 한 가지 주제로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에요. 해외투자자들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 시장을 거의 포기했거든요. 한국은 변하지 않는다고요. 그랬던 해외투자자들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 소식에 한국 시장에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최근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쓸 정도로 바쁜 몸이 됐다. 정부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시행하겠다고 예고하면서 그를 찾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해외투자자들로부터 콘퍼런스 콜 요청도 잦다. 지난 6일 CLSA증권이 주관한 콘퍼런스 콜에는 해외기관 300곳이 참여했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고 한다. 외국인투자자들이 그만큼 한국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또 최근에는 금융위원장과 한국거래소 이사장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실행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오는 19일엔 '일본의 기업거버넌스 개혁에서 배운다'라는 주제로 도쿄증권거래소의 주가순자산비율(PBR) 개혁의 요체와 성공 요인에 대한 포럼을 연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PBR, 자기자본이익률(ROE) 등 상장사 주요 투자지표의 비교공시를 시행하는 등 기업 가치를 제고하고 주주환원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30년 동안 시간에 쫓기며 일해오셨습니다.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봄, 가을에는 집 근처 매봉산에 오릅니다. 동작대교에서 보면 175m 정도 되는 야트막한 뒷산인데 봄, 가을에 2~3일은 꼭 산에 갑니다. 평소 건강관리는 걷기로 해요." 인터뷰를 진행한 날에도 이 회장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늘 걸어 다니는 습관이 배서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린 날씨에도 기자와 여의도 공원을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에 지친 기색이 없었다.
-최근 해외투자자들이 한국 자본시장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룹 포함해 300~400곳이 참가하는 콘퍼런스 콜이 좀 잡혀 있어요. 한국이 추진하는 거버넌스 관련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요. 외국인투자자들은 주로 밸류업 프로그램 실행에 대한 정부의 의지, 기업 반응, 제도 안착 여부 등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합니다. 일본에서 시행됐던 제도가 한국에서도 제대로 작동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죠."
우리나라 증시는 외국인의 이탈이 심각한 수준이지만 최근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증시 곳곳에서 감지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달 들어 지난 8일까지 외국인은 우리나라 주식을 4조9000억원이나 사들였다. 1월 한 달 내내 외국인들이 국내 주식을 순매수한 규모가 3조원이 채 안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6거래일 만에 폭발적인 매수세다. 정부가 추진하는 거버넌스 개혁을 통해 기업들이 회사 가치 제고에 발 벗고 나선다면 주가가 우상향할 것이라는 믿음이 반영된 결과다. 그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가치가 향상된다면 코스피지수가 3000까지 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다만 주주환원에 소극적이었던 국내 기업의 참여가 얼마나 적극적일지는 미지수다. 일본은 상장폐지 경고 같은 강력한 조치를 취해 기업의 변화를 끌어냈지만 한국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연성규범으로 기업들 스스로 시가총액을 높이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에 이 회장이 강조하는 것은 정부의 강력한 실행 의지다.
-이달 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한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발표합니다. 기업 반응은 어떤가요.
"두 군데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어요. 하나는 10대 재벌 기업이고, 한 곳은 30대 재벌 기업입니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궁금해서 연락했다고 해요. 기업들도 변화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거죠. 하지만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변화하는 건 쉽지 않죠. 정부에서 가이드라인을 주고 드라이브거는 것이 꼭 필요해요. 최근 우리 포럼에서 금융위원장과 한국거래소 이사장한테 공개서한을 보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지난 6일 금융당국에 공개서한을 보내 밸류업 프로그램은 최소한 3년 이상 추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프로그램 시행 주체가 경영진이 아닌 이사회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기업도, 이사회도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업은 생명체입니다. 꾸준히 변해야 해요. 이사회도 압력이 들어오면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회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외부에 의뢰해 컨설팅받으면 됩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는 한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한국 증시가 저평가받는 이유에 대해 후진적 지배구조, 낮은 주주환원율, 한국 경제의 태생적 한계 등을 주로 꼽는다.
-해외투자자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을 어디서 찾나요.
"총수에 대한 배려가 지나친 거버넌스가 문제라고 보고 있어요. 지배주주가 있으니 이사회가 주주이익을 충실히 대변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굳어졌다는 거죠. 그렇다면 대주주가 없는 은행주는 왜 주가가 디스카운트가 돼 있냐. 이건 관치금융 때문이라는 거죠. 또 한국경제의 산업구조는 부침이 심합니다. 이익 변동성이 커 주가에 대한 예측이 어려워요."
30년 경력을 자랑하는 국내 최고의 국제투자전문가인 그의 답은 거침이 없었다. 예전 일화에서도 시장을 향한 그의 날카로운 면모가 엿보인다. 2000년 2월에 삼성증권 상무로 재직 시 선거법 위반 혐의로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고발당한 일화가 있다. "여당 총선 패배는 구조조정 후퇴로 인식돼 외국인투자자의 이탈로 나타나면서 증시가 불안해질 것"이라는 그의 보고서 때문이다. 당시 이 보고서가 총선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시장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보다 선명하게 시장을 바라본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평가다.
1997년 초 홍콩페레그린증권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는 한국경제를 비관적으로 전망한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목을 받기도 했다. 거품이 빠지면서 자산디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시 국내 민간연구소와 관변 연구단체는 한국경제를 장밋빛으로 그리던 때였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를 예측한 보고서를 써낸 그가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삼성증권 초대 리서치센터를 맡았던 이유다. 이후에는 싱가포르로 건너가 헤지펀드를 설립해 3년간 운용하며, 글로벌 시장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메릴린치 서울지점 공동대표, 토러스투자증권 영업총괄대표, 노무라증권 아시아고객관리 총괄대표 등 외국계 증권사에 주로 몸담았던 그는 이제 거버넌스 개혁에 집중하고 있다.
이 회장은 1988년 대우증권에 입사해 젊은 애널리스트로 기업 분석을 할 때부터 국내기업이 만든 제품은 이미 '세계 최고'가 됐는데 금융시장 내 존재감은 왜 제자리걸음인지 고민했다. 당시 그는 그 답을 '경영진의 질'로 잡았다. 바로 지배구조(거버넌스)다. 일본과 한국의 거버넌스 격차는 10년 정도다.
"지금이라도 금융당국이 일본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해 이를 실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이 방안이 시장에 안착해 국내 자본 시장의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부 주도의 실행 의지가 가장 필요합니다." 기업들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금융당국 수장들의 리더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연성규범이기 때문이다. 이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상법으로 보호하는 경성규범이 함께 마련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도 했다. 현행 상법 382조는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에 대해서만 규정하고 있는데 이를 주주의 비례적 이익으로까지 확대해야 한단 의미다.
-공매도 금지 조치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십니까
"한국 주식시장에서 불법 공매도가 차지하는 거래 비중은 5%도 되지 않아요. 대부분 외국인투자자는 공매도 포지션을 헤지용으로 사용합니다. 매수·매도를 같이 가져가는 정통 헤지펀드 전략인데 공매도가 불가능하면 이들은 한국 증시를 떠나죠. 결국 유동성이 감소하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만약 정부가 공매도 제한 조치를 안 했으면 지금 코스피지수는 2800선까지 도달했을 겁니다."
공매도 금지 조치에 대해서도 본인의 소신을 감추지 않았다. 한국 시장의 장기 투자수익률이 전 세계에서 하위권을 맴돌고 코리아 디스카운트 불명예를 30년 넘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외국인투자자들의 공매도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매도의 순기능이 증시에 작용하는 효과가 더 크다고 봤다.
인터뷰 내내 부드러운 어조를 유지했던 그는 이 대목에서 꽤 단호하게 말했다. 자본시장의 선진화는커녕 겹겹이 더해지는 규제로 외국계 금융회사들이 한국에서 간판을 내리는 모습을 보며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했다.
"해외투자자들 사이에서 한국에선 돈 벌기 극히 어렵다는 인식이 퍼져 있어요. 시티그룹과 HSBC가 철수했고 중간 규모의 증권사들도 결국 한국에서 철수했습니다. 불법 공매도는 적발해 법적 조치를 취해야 마땅하지만 이 외 조치들이 과연 합리적인지는 고민해야 합니다. 예컨대 한국식 공매도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라고 하면 외국계 금융회사들이 이러한 수고로움을 감당하고 한국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죠."
결국 공매도 금지 조치로 해외투자자들은 상당수 한국 증시를 떠났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개인들이 채웠다. 증시에 개인투자자가 유입되면 유동성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반길 만한 일이지만 개인투자자의 경우 회전율이 높은 단타 투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시장의 변동성을 키운다는 지적도 많다. 최근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시행과 맞물려 저 PBR 종목이 하나의 테마주가 된 최근의 상황도 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 증시 강세의 숨은 공신은 영국계 행동주의펀드인 팰리서캐피털이라는 말이 있다. 팰리서캐피털은 작년 10월부터 자신들이 투자한 일본 케이세이 철도에 도쿄 디즈니랜드 운영회사(오리엔탈랜드)를 팔아 철도 사업에 재투자하라고 압박했다. 행동주의란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경영진 교체 등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해 주가를 올려 이익을 얻는 투자방식을 의미한다. 일본 기업들이 배당 확대나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가를 높인 이유도 행동주의펀드의 공세 때문이었다.
-일각에선 행동주의펀드가 경영권 지분 인수에만 관심 있다고 봅니다.
"행동주의펀드는 자본시장에서 메기 역할을 한다고 봐요. 순기능이 많습니다. 현금만 쌓아두고 비효율적으로 경영하는 기업을 변하게 만들죠. 사실 행동주의펀드 99%가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해외 행동주의펀드가 많이 들어올까요.
"미국 행동주의펀드가 일본에 다 들어왔고 일본 기업이 변화하는 데 일조했다고 봅니다. 한국은 일본과 산업구조가 유사하고, 사실 일본에 투자하면 한국도 같이 보는 경우가 많아요. 올해는 해외 행동주의펀드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해가 될 것입니다. 다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올지는 아직 지켜봐야 합니다."
플래시라이트캐피털파트너스(FCP)가 KT&G가 전·현직 사외이사들이 감시 의무를 소홀히 해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 부분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올해 행동주의펀드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국제금융투자 전문가로서 투자에 대해 조언 부탁드립니다.
"중국 기업에 직접 투자하기보다 중국에서 돈을 버는 서양기업에 투자해야 합니다. 또 한국과 미국의 투자 포트폴리오는 4대 6이나 5대 5의 비중이 알맞다고 봅니다."
투자 시 총수익률에 대해 끊임없이 복기해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은 숫자로 계산하지 않는 습관이 있어요. 모든 투자는 총수익률을 계산해서 내가 이 회사에 투자한 기간에 얼마만큼의 총수익률을 올렸는지 꼼꼼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그는 늘 투자 조언에 진심이다. 그의 저서 '좋은 주식 나쁜 주식'은 대학생들이 꼽는 가장 인기 있는 투자 입문 교육서로 평가받는다. 저서에 밝혔듯이 이 회장은 좋은 주식을 찾으려면 3가지 요소가 필수라고 강조한다. 지적 호기심, 섬세하게 관찰하는 능력, 신제품을 직접 체험하고자 하는 부지런한 자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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