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기소된 지 4년 11개월 만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에게도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부장판사 이종민 임정택 민소영)는 26일 4시간 넘게 진행된 선고 공판에서 일부 혐의에 대해서는 직권남용죄가 인정될 수는 있지만, 검찰이 제시한 증거만으로는 양 전 대법원장에게 범행의 공모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사법농단 관련 혐의로 기소된 14명의 전·현직 법관 중 유죄가 선고된 경우는 현재까지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2명뿐이다.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는 굵직하게 ▲행정부 상대 이익 도모 ▲입법부 상대 이익도모 ▲헌법재판소 상대 위상 강화 시도 ▲대내외적 비판 세력 탄압 ▲부당한 조직 보호 등이다.
우선 재판부는 행정부를 상대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을 도입하는 데 박근혜 청와대의 도움을 받고자 일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 확인 소송 등 재판에 개입한 혐의에 대해서 ‘일반적 직무권한’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구체적으로 일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과 관련해 판결 관련 대외비 보고서 등을 작성한 것에 대해서는 직권을 행사했지만, 남용하지는 않았다고 봤다. 또 당시 주심이었던 김용덕 전 대법관에게 청구기각 의견을 전달해 판결을 번복하고 재판절차를 지연시켰다는 검찰의 주장에 대해서는 직권을 남용하지 않고 권리행사를 방해해 의무 없는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피고 측 변호사에게 재상고 사건의 전합 회부 계획 등 공무상 비밀을 누설한 것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전원합의체 회부 계획 내지 재판의 결론에 대한 심증은 직무상 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외교부 의견서만 제출되면 청와대 및 외교부 등 정부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을 전합에 회부에 심리하겠다’는 발언의 내용은 직무집행상 지득한 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사건과 관련해 효력 집행 정지 관련 검토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혐의에 대해서는 일반적 직무권한에 해당하고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과 관련해선 직권을 행사했지만 남용하거나 의무 없는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봤다.
서기호 전 판사의 재임용 탈락 사건과 관련해 ‘신속 종결 의견’ 전달을 지시하는 등의 혐의는 일반적 직무권한에 해당하고 직권을 남용하지도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헌법재판소 내부기밀을 빼내 헌법재판소와의 위상 경쟁에 활용한 혐의 중 통합진보당의 행정소송 대응과 국회의원 행정소송 1심 재판 개입, 비례대표 지방의회의원 행정소송 1심 개입과 관련해선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이 일반적 직무권한을 행사했으며 직권을 남용하지도 않았고, 일부 혐의에 대해서는 지시한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준 혐의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직무권한 범위 내에서 행사한 일이라고 봤다. ‘정운호 게이트’ 관련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사 기밀을 수집하고 영장 재판에 개입한 혐의에 대해서는 일부 직권을 행사한 것은 있으나, 일반적인 직무권한 범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공보관실 운영비로 비자금 3억5000만원을 조성했다는 혐의에 대해서 재판부는 "일부 혐의 사실에 대해서는 위계가 인정되나, 예산편성이 위계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며 "재산상 이익 취득이나 불법이득의사가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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