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스템이 아날로그 속성을 동경하는 부분이 있다면, 인공지능 데이터가 소리나 감각을 통해 인간과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지점일 것이다. 바쁠 때라도 꼭 LP를 꺼내 바늘을 올려 듣는, 잡음 섞인 음악이 정든 고향 집처럼 편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 아닐까."
우주와 근원에 대한 사유를 디지털리티의 새로운 감각으로 형상화해 온 작가 김영헌은 20세기 회화의 특징이 모더니티에 있다며 이같이 설명한다. 그는 모더니티 회화의 평면성을 본질이라 파악하기에, 평면의 전제 아래 회화의 순수성을 추구한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는 김영헌 개인전 '프리퀀시'(Frequency)를 오는 20일까지 개최한다. 작가는 디지털 시대 '신회화'에 대해 순수성에서 탈피해 무엇과 섞여도 좋다고 말한다. 그는 이번 개인전에서 이 같은 사유를 담은 '일렉트로닉 노스텔지어' 연작 22점을 선보인다.
디지털리티로 대표되는 우리 시대 회화의 특징은 자연에서 느끼는 감각과 다른 인공적이며 새로운 감각이다. TV 브라운관의 노이즈나 컴퓨터 화면에서 왜곡된 장면, 영상을 볼 때 시간을 앞으로 넘기는 행위에서 오는 시간 왜곡의 감각,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정보나 이미지에의 노출까지. 작가는 이런 새로운 감각을 '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라고 지칭한다. 이러한 디지털리티는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이식돼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회화로 태어나고 있다.
작가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색을 충돌시켜 절묘하게 매치하거나, 이미 구축된 형식을 파괴해 새로운 감각을 창출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로 이번 연작을 완성했다.
전시명 '프리퀀시'는 회화 영역에 여타 다른 장르의 예술적 요소가 전혀 섞이지 않은 회화를 목표하는 모더니티 회화의 순수성과 달리 디지털리티 시대의 무엇이 섞여도 좋은 새로운 형식의 대조에서 기인했다. 선과 선이 만나 수직적 라인 집합체를 이루는 작품에서 라인 집합체는 액체처럼 흐르는 성질을 갖기도 하고, 고체처럼 견고한 느낌을 주기도 하며, 때로는 가벼운 기체의 인상을 만들어낸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의 주파수가 우연히 맞을 때, 화음이 되는 것처럼 회화에서도 노이즈와 보색, 상극이 우연한 회화적 주파수에 의해서 시각적 경이가 되는 것. 이것이 작가가 추구하는 경지다. 작가는 이를 회화적 주파수, 즉 '프리퀀시'라고 명명한다.
전시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인 'P23043-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는 동심원 형상을 통해 파동을 구현한다.
우주의 화이트홀과도 흡사한 형태로,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근원을 은유한다. 어릴 적 낚시를 하다가 물결의 움직임에 사로잡혀 시공간을 왜곡하고 변화시키는 듯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말한 작가는 당시 경험을 반영해 색의 충돌과 화합을 거듭하는 구조를 통해 조화를 찾는 작품을 완성해낸다.
표면의 색과 면, 형광색과 절단된 화면 구성 방법 등은 언뜻 디지털적 화면을 떠올리게 하지만, 혁필 기법을 연상시키는 줄무늬와 흩뿌려진 물감과 팔레트 나이프 자국, 기하학적 선과 스크래치 등은 아날로그 속성을 드러낸다. 작가는 아날로그의 연속성과 디지털의 비 연속성, 기하학적 파형과 자유 파형, 이질적 회화 요소의 공존과 대립을 통해 자신만의 회화적 상상력을 공고히 해나간다.
특히, 혁필 줄무늬와 팔레트 나이프로 만들어진 기하학적 색면 등 예측 불가한 요소들은 아날로그 음악이나 왜곡된 TV 화면, 필름 영화 속 스크래치 같은 변수처럼 오직 인간만이 남길 수 있는 창조적 요소를 남기고 더하며 작품을 완성한다.
작가는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영국 런던예술대학교 첼시 칼리지에서 석사학위 취득 후 혁신적인 설치미술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동물의 날고기로 만든 인체 형상이나 실험용 쥐를 사용한 설치 작품은 90년대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영국 유학 후 작가는 회화로 전향해 뉴욕, 프랑스, 홍콩을 오가며 '신회화(new painting)'라는 새로운 축을 따르고 있다. 그동안의 회화가들이 외부 세계의 재현, 심상의 표현, 형식미의 추구에 집중했다면, 김영헌은 우주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통해 얻은 결론을 회화로 구성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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