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의 노후 자금인 국민연금 기금 규모가 1000조원을 넘어섰다. 아직 공식 집계 전이지만 12월을 기점으로 국민연금의 기금 총규모가 안정적으로 1000조원을 웃돌고 있다. 지난해 국민연금은 '마이너스 8%대'의 수익률을 기록하면서 전 국민의 걱정거리가 됐다. 역대 최악의 수익률을 기록한 상황에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으로 서원주 최고투자책임자(CIO)가 취임했다. 그는 올 한해 시장과 호흡하면서 상황을 반전시켰다. 국민연금은 올해 100조원에 이르는 사상 최대 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1988년 삼성생명(옛 동방생명)에 입사했을 때 주식이 뭔지도 잘 몰랐다. 88올림픽이 개최되고, 주가지수가 1000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었다. 하루종일 '~카더라. ~카더라'하는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주식을 사고파는 주식팀이 재밌어 보였다. 신입사원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주식팀에 들어간 첫날 과장님이 물었다.
"뭐 사고 싶어?"
(현대차 산다고 하면 너무 뻔하고, 좀 더 있어 보이는 게 뭐가 있을까?)
"동양화학(OCI) 사고 싶습니다."
얼떨결에 친구가 다니던 회사 이름을 댔다.
당시에는 주식 거래를 하는 단말기가 기관당 한두대 정도만 보급되던 시절이었다.
"얼마나 사고 싶어?"
"10만주 사고 싶습니다."
그날 저녁쯤 증권사에서 연락이 왔다. 10주가 체결됐다고 했다. 알고 보니 하루에 100주도 거래가 안 되는 종목이었다.
종가는 매수가 보다 200원이 내려가 있었다. 선배가 다시 불렀다.
"네가 오늘 얼마 깨 먹은 줄 알아?"
"200원 곱하기 10만주 해봐"
"2000만원…."
정신이 아득해졌다. 월급이 50만원이던 시절이었다. 그날 집에 가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 앞으로 어떡하지?'
35년 후 그는 1000조원의 자금을 움직이며 '자본시장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국민연금 CIO가 된다.
그 누구보다 초연하다. 1997년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1년의 'IT 버블 붕괴+9·11테러',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등 커다란 위기들을 몸으로 겪었다.
"다 내 책임이다. 내가 있는 자리에 과거에 누가 있었던, 지금 수익률 상황이 마이너스라면 현재 이 자리에 있는 내 책임이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원망도 자만도 없이 오직 본업에만 충실할 수 있다."
서 본부장이 35년간 투자 운용을 하면서 깨달은 점이다. 타인의 자산을 운용하는 일, 그 엄중한 책임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1965년생인 서 본부장은 1988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해외투자팀, 뉴욕 투자법인, 싱가포르 투자법인 등을 거쳤다. 2014년에는 PCA생명보험(현 미래에셋생명)으로 자리를 옮겨 자산운용본부장을 맡았다. 2019년부터 2022년 5월까지 공무원연금공단에서 자금운용단장(CIO)을 지냈고, 지난해 말부터 국민연금에서 국민들의 노후 자산 운용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 단련됐다. 그는 투자 운용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한국의 금융사들이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패닉셀(공포에 의한 투매)'하는 모습을 봤다. 주식 변동성이 커지자 자산들을 무작정 바닥에서 다 팔아버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모습이다.
반면 운용 역사가 100년 가까이 된 네덜란드 공무원연금 등 해외기관은 큰 위기가 발생하면 준비된 절차에 따랐다. '분석-조사-보완-보고-대응'의 체계적인 프로세스로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며 배웠다. 국내 최대 연기금인 국민연금 CIO로서 시장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 흔들리지 않고 운용역들을 믿어 줄 수 있는 바탕이 된 소중한 경험들이다.
"투자운용업에서 리더의 역할은 모든 일에 개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어주는 사람이다."
그는 후방에서 시장의 큰 변동성이나 연쇄반응 등 위험한 것들을 챙겨본다.
초기 주식투자는 시장에 떠도는 '카더라' 정보로 움직였다. 서 본부장은 소문 대신 가격을 움직이는 팩트를 찾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자산군이 달라도 기업을 보는 원칙은 똑같았다. 결국 기업의 가치에 투자를 하는 것이다.
판단, 의사결정의 영역으로 오면 그의 머릿속은 항상 바쁘게 움직인다.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입장을 한 번씩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끝없는 시뮬레이션이 이뤄졌다.
내 관심사가 아니라 상대방의 관심사와 배경을 바탕으로 거꾸로 한번 생각해본다. 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아 보이고 사고 싶은 자산이라도 반대쪽에는 그 자산을 파는 사람이 있다.
'나는 사고 싶은데 상대방은 왜 팔까'
항상 반대쪽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 이 습관은 한 때 그의 건강을 상하게도 했지만 투자에는 큰 도움이 됐다.
2000만원 손실에 사시나무처럼 떨었던 신입사원은 경험이 쌓이면서 주식, 채권, 대체 등 전체 운용을 다 볼 수 있게 됐다. 자산 배분하는 전략부서에 근무한 것이 운용에서 전체를 보는 눈을 길러줬다. 삼성생명 싱가포르 투자법인에서 아시아 지역 투자 책임을 총괄하는 역할까지 맡게 됐다.
주식, 채권, 대체투자 중 하나의 자산투자를 전문으로 하다가 CIO로 올라온 사람들도 있지만, 서원주 본부장은 다르다.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삼성생명 출신 CIO들이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금 규모가 1000조원을 넘어서면서 세계 3대 연기금으로서의 국민연금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국민연금보다 규모가 큰 곳은 6월 말 기준 일본 공적연금(GPIF·1997조 원)과 노르웨이 국부펀드(GPF·1885조 원)뿐이다. 서 본부장은 책임이 무거워질수록 오직 운용과 수익이라는 본질에 더욱 집중한다.
"투자라는 것, 최고투자책임자의 존재 이유는 성과를 내고 위험을 관리하는 것이다. 투자 가이드라인만 따라 할 것 같으면 내가 왜 필요하겠나. 가이드라인이 생긴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6개월에서 1년 동안 이 가이드라인이 정말 올바르게 작동했는지, 운용 수익에 도움이 됐는지, 따르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등 다각도로 점검한다. 본질은 수익률이다. 항상 본질을 생각하고 정체돼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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