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Next]전기차 '속도 조절'에 외려 안도하는 배터리 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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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가 기대만큼 팔리지 않자 배터리 공장 가동에 제동이 걸렸다. 신규 공장 건설도 늦춰졌다. 그러나 배터리 기업들은 안도하고 있다. 숨 가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던 투자, 양산 부담을 덜 기회라는 얘기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주요 수요처인 북미와 유럽에 동시다발적으로 수십조원을 투자해 공장을 세우고 있다. 투자는 늦춰졌지만, 내실을 다질 시간을 벌게 됐다.


설비투자가 이익의 5배…속도 조절에 안도하는 배터리 3사

최근 한 달 새 국내 배터리 기업들과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의 합작공장 설립 계획이 세 차례나 수정됐다. 우선 LG에너지솔루션과 포드의 튀르키예 배터리 합작공장 투자가 철회됐다. 당초 이 공장은 포드의 유럽향 전기차의 전초기지 역할을 할 예정이었으나, 전기차 전환 속도가 늦춰짐에 따라 무산됐다. 미국에서는 포드와 SK온의 미국 켄터키 2공장은 2026년 가동이 늦춰졌다. LG에너지솔루션과 GM의 합작 공장도 올 연말 가동을 준비하다 건설이 지연되면서 내년 초로 가동이 미뤄졌다.

또 SK온의 미국법인 SK배터리아메리카(SKBA)는 전기차 수요 부진으로 인해 미국 조지아주 공장의 배터리 생산을 축소하고 일부 직원에 대해선 휴직 조치를 실시하기로 했다.


투자 지연, 생산 축소에도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표정이 밝다.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 겸 한국배터리산업협회장은 지난 1일 ‘2023 배터리 산업의 날’ 행사에서 전기차 수요 위축과 관련해 "국내 배터리 3사가 예외 없이 수요 감소를 겪고 있을 텐데, 오히려 잘됐다"며 "원래 계획대로 진행됐으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공장 짓는 인력이 도리어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급히 성장하다 보니 간과한 여러 것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다지다 보면 K-배터리가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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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兆)단위 투자에 따른 재무 부담을 안은 기업들은 숨을 고를 여유를 찾았다. LG에너지솔루션은 북미에만 생산공장 8개(단독 2개·합작 6개)를 건설·운영 중이다. SK온도 북미에서 6개(단독 2개·합작 4개)를 건설 또는 운영하고 있다. 삼성SDI는 인디애나에 배터리공장 3개를 2025년부터 가동할 계획이다.

대규모 공장 가동을 앞두고 배터리 3사의 재무 부담은 갈수록 늘고 있다. 올해 국내 배터리 3사의 CAPEX(설비투자)는 20조원 이상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LG에너지솔루션이 10조원, SK온이 7조원, 삼성SDI 역시 3조원 이상이 예상된다. 올해 배터리 3사의 이익 합계가 4조1000억원 수준인 것을 고려할 때, 설비투자가 벌어들이는 돈의 5배가 넘는 것이다.(에프엔가이드 컨센서스) 공장 가동 연기는 다소 매출 성장이 지연되는 것일 뿐 오히려 비용 조달과 원재료 수급, 인력 확보 등 측면에서 여유를 줬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1000조원 이상 쌓은 수주 잔고가 변하지 않는 이상, 배터리사에게 투자 조정은 큰 타격이 되지 않는다는 평가도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 올해 3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지난달 기준 수주잔고 500조원 이상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업계는 SK온이 300조원, 삼성SDI가 260조원 이상의 수주 잔고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시장 위축은 새롭게 시장에 참가하려는 신생 기업들의 자리를 더욱 좁히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 기업들은 이미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과 수주계약, 합작사 설립을 통해 배터리 산업을 추진 중이다. 계획했던 공장마저 늦추는 마당에 기술력이 확인되지 않은 신생 기업의 진입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한발 앞선 국내 기업들에 유리한 시간이다.


캐즘 찾아온 전기차·배터리 시장…관건은 가격·생산 비용 하락

다만 배터리 공장의 건설·가동 계획 변경은 전기차 성장세가 꺾이고 있다는 증거다. 2020년 이후 각국의 친환경 자동차 정책에 따라 수요가 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전기차 시장은 그 성장세가 완연히 둔화하고 있다. 고금리 장기화와 경기 위축이 한몫했다. 미국 전기차 판매 증가율은 2021년 94%, 2022년 67%, 올 상반기 50%로 점점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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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장의 전기차 침투율이 13%를 넘어서면서 ‘캐즘’에 이르렀다는 평가다. 첨단 기술이나 상품이 출시된 후 초기 시장과 주류 시장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수요가 정체되거나 후퇴돼 단절이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전기차가 대중화 문턱을 넘으려면 높은 가격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성장과도 얽혀있는 대목이다. 전기차 시장도 초기에는 고성능 전기차가 주목받으면서 비교적 가격이 비싸지만 에너지 밀도가 높은 NCM(니켈·코발트·망간) 삼원계 배터리가 주목받았다. 국내 기업들이 강점을 가진 배터리 종류다. 하지만 전기차 시장이 대중화 단계로 넘어가면서 중저가 전기차와 값이 싼 LFP(리튬인산철) 배터리에 대한 관심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전기차 시장이 캐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원가 절감이 필수적이라는 진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배터리 투자 지연이 원자재 가격 하락을 유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단기간 과열된 원자재 확보 경쟁이 사라지면 주요 광물을 웃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장기적으로 호재다.





정동훈 기자 hoon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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