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서른인데 집 한채 사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게다가 집주릅(중개인) 같은 놈들에게 사기까지 당하면 앞으로 이런 일은 손도 못 댈 것이다. 그저 꼼꼼히 계산하지 않고 경솔하게 결정하니 매번 이런 식인 것이다"
1784년 7월 한양 명동에 집을 사려고 2000냥이란 거금을 대출받아 집을 알아보러 다니던 유만주(兪晩柱)라는 선비가 자신의 일기에 남긴 글이다.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해 서른이 넘어서도 백수였던 그는 익산 군수가 된 아버지를 대신해 서울에 집을 사고자 당시 고리대금업도 함께했던 경강상인들에게 2000냥을 대출받아 신축한 기와집을 매입한다.
2000냥은 당시 매우 큰 돈이었다. 8명의 대가족이 25년간 생활 가능한 수준의 돈이라 하니 대충 환산해도 오늘날 20억원은 족히 넘는 거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거금에도 한양의 기와집은 매물로 나오면 그 즉시 팔리곤 했다. 그는 앞서 명동 외에도 한양에서 좋은 매물 여섯군데를 찾아 계약을 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대기번호만 받고 밀려나다가 결국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집을 사게 된다.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은 이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의 진솔한 부동산 '영끌' 이야기들로 구성돼있다.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선비들이 과거시험 공부 뿐만 아니라 얼마나 치열하게 임장을 다니며 한양의 집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보여준다.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돈을 천시여기고 청렴개결을 부르짖는 선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저자는 조선 건국 이후 선비들이 부동산을 대하는 자세가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그들의 일기와 각종 기록들을 통해 보여준다. 조선은 본래 고려 권문세족들의 끝없는 대토지 겸병과 부동산 투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나라였다. 과전법을 발표해 종래 권문세족들의 땅문서를 모조리 불태워 토지 공개념을 근간으로 삼았던 국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건국 이후 가속화 된 인구 증가와 화폐경제의 등장으로 이 공개념은 산산조각이 난다.
특히 우리가 흔히 엽전이라고 일컫는 화폐, 상평통보가 전국 곳곳에 통용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선비들은 부동산을 목숨처럼 여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세기로 넘어가면서 부정부패와 근대화 비용을 명목으로 씀씀이가 커진 조선 조정은 계속해서 화폐를 대량으로 발행하며 조선판 양적완화를 단행했고, 이로인해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선비들은 물론 평민들도 모두 부동산 투자에 더욱 집중하게 됐다.
구한말인 1890년대에는 불과 10년 동안 집값이 20배를 넘게 뛰며 매우 불안정한 흐름을 보이면서 19세기판 영끌 투자는 극에 달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해방, 6.25전쟁 등의 대혼란을 겪으면서 바닥을 쳤던 집값은 다시 한국의 산업화와 함께 오늘날에 이른다.
저자는 500년 동안 끊임없이 전개된 조선왕조의 주거문제 해결이 끝내 실패한 것은 한양 부동산 앞에서는 마냥 청렴할 수 없었던 선비들의 탐욕과 주거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경쟁과 탐욕만이 지배하는 부동산 시장 과열이 지속되면 결국 국가가 지탱될 수 없고, 그 피해는 모든 계층이 고스란히 안아야한다는 교훈을 잊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정치사나 전쟁사에 가려진 조선시대의 현실적인 경제분야나 부동산 분야에 관심많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박영서 지음|들녘|360페이지|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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