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소주의 역사엔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시대의 고통이 스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괴롭다'고 말할 때면 흔히 소주를 찾는다. '소주'란 말에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이 개입돼 있는 것이다." 윤대녕 「소주와 맥주, 그 뜨거움과 차가움에 대하여」
소주는 1960~1980년대 경제개발 시대를 거치며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역할을 했다. 태생이 식량부족이란 가슴 아픈 시대 사정에서 비롯된 술인지라 쓰디쓴 일상의 피로와 고뇌를 씻어주는 역할이 그 시절 소주의 주된 임무였고 존재의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소주는 더 이상 고된 하루와 함께 삼켜 넘기는 이름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인과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동반자 역할은 물론 산업화를 거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면서 도수를 낮추고 설탕을 줄이는 등 시대와 함께 변화하며 K-컬처의 트렌디함을 세계에 보여주는 아이콘으로 거듭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 건 고려 후기 충렬왕 무렵으로 전해진다. 소주는 몽골에서 유래했는데, 원나라의 고려 지배기에 병참기지를 설치한 개성과 안동을 통해 주조법이 유입됐다고 한다. 소주와 같은 증류주는 10세기경 연금술이 발달한 아랍에서 가장 먼저 증류 기술을 통해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화한 술의 모습이 땀방울 같다고 해서 땀이라는 뜻의 ‘아라크(Arak)’라고 불렀다. 이것이 다양한 지역으로 전파돼 몽골에선 ‘아라키’, 만주에선 ‘알키’, 원나라를 통해 증류주를 받아들인 고려 개성에선 ‘아라길주(阿喇吉酒)’로 각각 불렸다.
소주는 본디 곡물을 발효해 만든 술을 추가로 정제해 만든 증류주다. 술의 주성분인 알코올과 물은 끓는점이 각각 78도(℃)와 100℃로 다르다. 이로 인해 발효주를 가열하면 알코올이 물보다 먼저 더 많은 양이 증발하게 된다. 이 증발하는 기체를 모아 냉각시키면 다시 액체로 변하고, 이 과정에서 본래 발효주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무색투명한 술을 얻을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친 술이 증류주다. 일반적으로 발효주를 증류주로 만들면 양이 3분의 1에서 10분의 1 정도로 줄고 추가 공정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양조주보다 가격이 높고 귀해 과거 조선에서도 증류식 소주는 상류계층의 술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소주는 증류식이 아닌 희석식이다. 희석식 소주는 카사바 등 염가의 원재료에서 뽑은 전분을 발효, 연속 증류해 얻은 고순도 주정(酒精)을 이름처럼 물로 희석하고 여기에 감미료를 첨가한 것이다. 희석식 소주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1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6월 평양에 최초의 희석식 소주 공장인 조선소주가 세워졌고, 현재 진로 소주의 전신인 진천양조상회도 1924년 10월 평안남도 용강군에 설립됐다. 희석식 소주 공장은 1920년대 수천 개에 이를 정도로 확산했지만,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생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많은 공장이 폐업했다.
희석식 소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술로 자리 잡게 된 데는 1965년 박정희 정부가 개정한 양곡관리법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쌀 생산량은 1977년 쌀 자급이 이뤄지기 전까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만성적인 쌀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정부는 쌀로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는 양곡관리법을 반포했다. 이때부터 쌀 대신 저렴한 재료로 만든 주정을 활용한 희석식 소주가 기존 주류의 대체재로 떠올랐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알코올 도수 인하의 흐름이 시작된 것도 양곡관리법과 연관이 있다.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알코올을 물에 희석시키는 지금의 희석식 소주가 대량생산에 돌입한 만큼 도수 역시 이전보다 낮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1924년 첫 출시 당시 진로 소주의 도수는 35도(%)였다. 이것이 1965년 30도로 낮아진 데 이어 1973년 25도로 내려갔다. 이후 20년 넘게 모든 업체가 같은 도수를 유지하면서 ‘소주=25도’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25도의 벽이 깨진 건 1998년 하이트진로가 23도의 ‘참이슬’을 선보이면서다. 이후 저도수 경쟁에 속도가 붙었다. 2001년 22도, 2004년 21도 소주가 연이어 나오더니 2006년에는 19.8도짜리 소주가 나오면서 20도의 벽마저 무너졌다. 지난 3월에는 충청권 주류업체인 맥키스컴퍼니가 14.9도 제품을 선보이면서 15도 아래까지 내려갔다. 100년 만에 도수가 절반 이하로 낮아진 셈이다.
국내 소주시장이 현 구도를 형성한 건 1990년대 후반 이후다. 1970년 국내 소주시장 1위에 오른 이후 40여년간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진로는 1998년 10월 ‘소주는 25도’라는 인식을 깨며 저도화 제품인 참이슬을 선보였다. 대나무숯 여과공법을 도입해 소주의 이미지를 부드럽고 깨끗하게 바꾸겠다는 목표로 출시된 참이슬은 배우 이영애를 광고모델로 전격 발탁했다. 소주 모델은 남성이 주류였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이후 지금까지도 소주 광고에는 최고의 여성 스타들이 나서고 있다.
부드럽고 깨끗한 맛을 강조한 참이슬은 이후 9차례에 걸친 제품 리뉴얼을 통해 브랜드 파워를 키워왔고, 현재까지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최대 소주 브랜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영국 주류전문 매체 드링크인터내셔널에 따르면 참이슬을 포함한 하이트진로의 소주 통칭 브랜드 진로(JINRO)는 지난해 판매량 기준 22년 연속 세계 1위를 지켰다.
하이트진로의 참이슬과 진로에 맞서고 있는 브랜드가 롯데칠성음료 ‘처음처럼’이다. 처음처럼은 롯데칠성이 인수하기 전 두산주류가 2006년 2월 출시한 소주 브랜드다. 앞서 두산주류는 강원도 소주인 경월을 인수해 ‘그린소주’를 서울·경기 지역에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1998년 참이슬의 등장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2000년 선보인 ‘산소주’ 역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심기일전해 내놓은 제품이 처음처럼이다.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두세 글자가 대부분이었던 기존 소주와 다르게 네 글자 이름을 채택했다.
처음처럼은 지난해 9월 제로슈거 소주 ‘새로’를 선보이며 하이트진로 추격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새로는 소주 고유의 맛을 지키기 위해 증류식 소주를 첨가했고, 내년부터 본격 도입되는 주류 제품의 영양성분 표시를 선제적으로 적용했다. 여기에 투명병을 적용해 고급스럽고 트렌디한 이미지를 부각시켜 출시 1년 만에 판매액 1000억원을 넘어섰다.
평균 약 55병. 우리나라 성인 1명이 연간 마시는 소주(360㎖ 기준)의 양이다. 전통주, 위스키, 와인 등 다양한 주종(酒種)과 경쟁하고, 주정과 공병 등 원부자재 가격과 물류비 등 제반비용 상승으로 소비자 가격이 올라 국내 소비량은 조금씩 줄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8년 91만7959㎘였던 희석식 소주 출고량은 지난해 86만1540㎘로 4년 만에 6.1% 감소했다. 소주 제조사는 해외시장을 확대하며 타개책을 모색하고 있다. 관세청 수출입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일반 소주 수출액은 9332만7000달러(약 1154억원)로 전년 대비 13.2% 증가했다. 과일소주가 포함된 기타 혼합주 분야도 인기가 높아 지난해 수출액이 8896만5000달러(약 1100억원)로 전년보다 9.9% 증가했다. 수출량도 5만4000t으로 금액과 물량 모두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소주는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로 각인돼 있다. 한식진흥원이 지난해 9~10월에 걸쳐 전 세계 15개국 외국인 85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한국 술 가운데 알고 있는 주종으로 ‘소주’를 꼽은 비중이 41.2%로 가장 높았다. 대륙별로는 동남아시아에서 소주를 알고 있다고 답한 비중이 68.1%로 가장 높았고, 동북아시아(51.2%), 북미(30.3%), 오세아니아·중남미(27%), 유럽(17.2%) 순이었다.
하이트진로는 주력 소주인 참이슬을 80여개국에 수출하면서 2020년 수출액 7486만 달러에서 매년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가 지난해 1억2000만 달러로 역대 최대 실적을 썼다. 처음처럼과 순하리를 내세운 롯데칠성음료도 50여개국에 소주를 수출하며 2019년부터 3년간 성장률이 전년 대비 15% 안팎을 기록했고, 지난해에는 48%나 증가했다. 미국과 캐나다, 필리핀, 호주, 베트남 등의 순으로 회사 제품의 인기가 높다.
이들 기업은 인지도가 높은 나라를 중심으로 소주 세계화를 위해 관련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최근 해외 법인 하이트진로싱가포르를 통해 베트남에 소주 생산 공장을 건립하기 위한 초석을 다졌다. 베트남 타이빈성 그린아이파크 산업단지 사업자와 전대차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하이트진로가 해외에 생산 공장 건립을 추진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회사 측은 최근 6년간 연평균 15%씩 증가한 소주 수출량이 10년 뒤에는 2022년 대비 3배 이상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해외 소주시장의 지속적인 성장세와 원가 경쟁력, 현지 브랜드와 제품 출시 가능성 등을 고려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롯데칠성음료도 최근 연 매출 약 1조원 규모의 ‘필리핀펩시’의 경영권을 취득하고, 이를 종속기업으로 편입해 독자 경영권을 확보했다. 이곳을 통해 자체 음료와 소주 브랜드로 동남아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소주를 현지에서 생산하고 인근 지역으로 유통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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