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모르시는군!" 배우 설경구(56)는 '좋은 사람 같다'는 말에 이같이 답하며 웃었다. '그놈 목소리'(2007) '소원'(2013) '생일'(2019)에 이어 '소년들'까지 실제 발생한 사건을 소재로 다룬 영화에 연이어 출연했다. 두렵지는 않냐고 묻자 "두려워할 게 뭐가 있냐"고 반문하며 "안 한다고 거절하면 오히려 회피하는 거 같아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이번에는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2012) '블랙머니'(2019) 등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정지영 감독과 손잡았다. 그는 "정열적인 정 감독의 눈을 회피할 수 없었다"고 떠올렸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설경구는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영화를 연출하신 연출자에게는 뭔가가 있다"며 "강렬한 힘에 끌린다"고 했다. 정지영에 관해 그는 "남들은 조심스러워서 입 밖에 꺼내지 않는 말도 사회적 메시지로 던지는 분"이라며 "정열적인 분"이라고 말했다.
한 상갓집에서 우연한 만남이 '소년들'로 이어졌다. 설경구는 "정지영 감독을 작품으로 뵌 게 아니고 상갓집에서 우연히 뵙고 인사를 했다. 내게 '작품 한번 해야지' 하시기에 '영광이죠' 답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책(대본)을 보내셨다"며 웃었다. 처음 그가 받은 책의 제목은 '고발'이었다. 그는 "영화 '강철중:공공의 적'(2008)을 하고 나서 형사 역할은 밀어냈었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소년들'은 사건도 사건이고, 정 감독님이 주신 책이라서 거절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1999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 한 슈퍼에서 3인조 강도가 침입해 주인 할머니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9일 만에 동네 소년 3인이 용의자로 검거되고 범행 일체 자백과 수사가 종결됐다. 그러나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일명 '삼례나라 슈퍼사건'은 올해 영화 연출 40주년을 맞이한 정지영 감독의 손에서 영화로 제작됐다.
'소년들'은 최근 실제 사건이 발생한 전라북도 전주에서 시사회를 열고 유가족, 누명 쓴 피해자 세 분, 진범, 박준영 변호사 등에게 개봉 전 영화를 선보였다. 설경구는 "엊그제 전주에 다녀왔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자리에는 유가족도 있었고, 소년(피해자) 중 한 분이 왔어요. 그분 가족도 오고 진범도 왔죠. 아, 말하면서 소름이 끼치네…. 낙동강 살인사건 누명 쓰신 두 분도 오셨고, 화성 연쇄살인사건 8차 사건 누명 쓴 분과 약촌오거리 황반장도 오셨어요. 피해자분들 보며 한이 맺힌 거 같더라고요. 딸이 돌 때 감옥에 들어갔는데 나왔더니 24살이 됐더래요. 스물셋에 들어가서 마흔넷에 나온 거죠.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갔구나. 돈을 보상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 무슨 경지에 오른 분 같았어요. 삼례 사건 진범을 보면서도 마음이 이상한 거예요. 진술을 해줬으니까 고맙다고 해야 하는 상황인가. 그분도 영화를 보러 와주셨고. 복잡해지더라고요."
설경구는 자리에 모인 분들과 부지런히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실제 진범 세 명 중 한 명이 시사회에 왔다고. 다른 이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또 다른 이는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진범이랑은 끝내 대화를 못 했다"며 말끝을 흐렸다. 이어 "진범한테 안 가지더라.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발이 안 떨어졌다. 인사는 했는데 못 갔다"고 했다.
자리에는 실제 사건 진범의 존재를 밝힌 박준영 변호사도 있었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회 약자들의 목소리가 돼 주는 변호를 이어오고 있다. 영화 '재심'(2017)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설경구는 "희한한 분"이라며 말을 이었다.
"박준영 변호사에게 '뭐 먹고 사세요?' 물어봤더니 '요새 조금 받습니다' 그러시더라고요. 강연을 하고 조금 받으신다고요. 많은 대화를 못 나눴지만 강렬했어요. 존경스러운 분이에요. 사건 관계자가 박준영 변호사 때문에 울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없이 사는 줄 몰랐다고요.(웃음)"
작품을 선택할 때 흥행 성적, 출연료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배우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화 소재 영화를 연이어서 하는 설경구의 행보는 이채롭다. 리스크를 감내하면서 기꺼이 약자들의 편이 돼 주는 이유를 묻자 그는 "내가 찾아다닌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거르지도 않는다. 감독님들이 분노에 차서, 눈에 불을 켜고 들어오는데 어떻게 외면하겠냐"며 호방하게 웃었다.
"삼례슈퍼사건, 많이 알려졌다고들 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촬영하면서 '아 모르는 사건이었다'고 느꼈어요. 착각이었구나. 젊은 친구들은 알까요? 몰라요. 전주 시사회에 온 한 젊은 관객이 심지어 전주에 사는데 사건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약촌 오거리 사건이요? 몰라요. 많은 사람이 안다고 착각하시는 거 같아요. 영화를 통해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어요."
흔히 말해 좌표를 찍고, 낙인찍히기 쉬운 사회다.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를 고려할 때, 실화를 차용한 영화에 연이어 출연하는 게 두렵지는 않냐고 묻자 "그건 후진 일"이라며 "용기를 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진실을 이야기할 때도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라고 말했다.
설경구는 "영화에는 마지막 법정 장면에서 소년들이 용기 내어 '우리는 진범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촬영하면서 다소 투박하지 않나 싶었는데, 영화를 보고 놀랐다"고 했다. "감독님이 '소년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이야기였다는 걸 영화를 보고 알았죠. 아이들을 데리고 세상에 외치고 싶었나봐요. 억울하게 내몰린 약자들의 편에 선 소시민들이 되돌리는 이야기라고 봤죠."
"실제 누명 쓴 소년들이 영화 속 마지막 법정 장면을 보고 감사하다고 하셨어요. 자신들도 법정에서 그러고 싶었는데 사실 그러지 못했다고요. 자신들이 당한 불의를 끝내 말하지 못했다고. 재심받으러 가면서도 두려워했다고 하더라고요. 기억이 10여년 전에 머물러 있었던 거죠. 나이는 들었지만 두려웠다고요. 혹시 욕하면 어떡하나. 영화로나마 말해줘서 고맙다고요. 투박하게, 덜 배운 아이들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용기 내야 하는 세상을,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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