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를 겪으며 기업의 자금조달시장이 큰 폭으로 올랐다가 내리앉는 등 변동성을 크게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미국 장기국채 금리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경신하는 등 대외 불확실성이 장기화되고 있는데, 기업들이 자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채권, 주식 등 자본시장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5일 ‘민간기업 자금조달 여건과 자본시장 발전을 위한 개선과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자금순환 통계를 상반기 기준으로 분석한 이번 연구결과에 따르면, 민간기업(비금융기업 중 공기업 제외)이 코로나 기간 중인 2022년 상반기에 시장에서 조달받은 자금(285.3조원)은 코로나 이전(2019년 상반기)보다 217.4조원 증가했다. 3년 만에 4.2배 증가한 자금조달 규모는 이후 불과 1년 만에 204.6조원 감소해 올해 상반기(80.7조원)에는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대한상의는 "올 상반기 기업이 조달받은 자금은 총액으로만 따지면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이지만, 서서히 내려온 것이 아니라 불과 1년 만에 경착륙 하면서 기업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자금시장 변동성의 확대는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을 키워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업의 자금조달 변동성을 키운 것은 금융기관 차입액의 변화가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 실제로 은행대출 등 금융기관 차입액은 코로나 이전인 2019년 상반기 57.0조원에서 코로나 3년 후인 2022년 상반기 120.5조원(+63.5조원)으로 늘어났다가 1년 후인 2023년 상반기 37.4조원(-83.1조원)으로 줄었다.
반면, 주식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2019년 상반기 13.9조원에서 2022년 상반기에 27.4조원(+13.5조원)으로 늘어났다가 1년 만에 12.7조원(-14.7조원)으로 줄었고, 같은 기간 회사채 발행은 12.4조원에서 1.9조원(-10.5조원), -2조원(-3.8조원)으로 각각 줄었다.
보고서는 자금순환이 계절성을 갖기 때문에 상반기 지표 기준으로 분석했다고 밝혔다.
대한상의는 기업 자금조달의 대규모 축소에 대한 원인을 우리나라 직접금융 시장의 취약성에서 찾았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기업의 금융기관 차입금 의존도는 더 커졌고, 주식, 채권 등 직접금융시장으로부터 자금조달은 줄었다. 문제는 간접금융시장(금융기관 차입금+정부융자)은 직접금융시장(회사채+주식)에 비해 금리인상 등 외부충격으로부터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구조다.
실제로 지난해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들도 자금조달에 애로를 겪어 은행 대출창구에 몰렸고, 여기에 기준금리가 급격히 오르면서 기업들의 매출액 대비 이자부담 비중은 1년 전(2022년 2분기) 1%대 미만에서 최근(2023년 2분기) 1.5% 수준으로 근접했다.
상의는 자본시장이 실물경제를 뒷받침하고 기업에 안정적인 자금을 공급처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자본시장 규제 완화 ▲연기금의 공공성 확대 ▲시장안정화기구 준칙화 ▲SLB 인센티브 강화 등을 제안했다.
먼저 주식시장에서의 외국인투자자들의 참여폭을 넓히기 위해 현재 전기, 방송, 통신 등 특정산업 내 33개 종목에 적용되고 있는 외국인 지분제한을 완화할 것을 제안했다. 경기방어 효과 및 외국인 투자수요가 높고, 외국인의 경영권 장악 방어가 가능한 업종부터 지분제한을 순차적으로 완화하자는 내용이다.
그간 우리나라의 외국인 지분취득 제한은 한국 증시에 대한 외국인의 참여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걸림돌로 작용했다. 각 국가의 증권시장이 선진국 수준인지를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MSCI(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네셔널) 선진국 지수는 통신 종목의 외국인 투자 여력을 문제 삼았고, 이로 인해 올해 6월 우리 증시의 선진국 지수편입이 불발됐다.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한국이 MSCI 선진국시장지수에 편입될 경우 440억 달러(약 59조원)의 자금이 유입되고, 코스피는 30% 이상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둘째, 공적연기금의 국내주식 투자비중을 선진국 수준으로 상향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투자비중은 14.6%(2023년 2분기말)인데, 이는 일본공적연금(GPIF)의 24.4%(2023년 1분기말)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대한상의는 연기금이 ‘수익성’ 강화를 위해 해외자산의 비중을 늘리고 있지만, 연기금의 또다른 중요한 운용원칙 중 하나인 ‘공공성’도 함께 견지하여 국내자본시장을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셋째, 자본시장의 중요한 한 축인 회사채 시장 활성화를 위해 금융시장 안정화 기구의 설치·운영방식 등을 준칙화할 것을 주문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지난 팬데믹 과정에서 주요국들은 금융시장 안정화 기구를 마련해 자본시장의 안정성을 강화했다. 우리나라도 2020년 10조원 규모의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를 설치하고 비금융회사가 발행한 회사채, CP를 적극 매입하여, 실물부문 유동성 지원, 기업 자금조달 애로해소, 시장의 투자심리 안정 등에 기여한 바 있다.
상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는 경우, 시장 안정화 기구의 즉각 설치, 대규모 재원 신속출연, 재원운용의 적절한 통제 등이 빠르게 이뤄지도록 설치 및 운영방식을 매뉴얼화하고, 입법 마련을 통해 법적보장 해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경우, 금융시장 안정화 기구의 설치기준과 프로그램 운영방식, 의회에 대한 사후 정보보고 의무 등을 연준법으로 규정하여, 위기발생시 보다 빠른 대처가 가능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넷째, 최근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지속가능연계채권(SLB, Sustainability-Linked Bond)의 국내시장 활성화 필요성을 주장하며, 신·기보 보증 강화, 투자자 및 발행사에 대한 세제지원 등 SLB 채권에 대한 인센티브 매커니즘 강화방안을 내놨다. SLB는 발행사가 사전에 약속한 환경·사회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투자자에게 당초 약속된 이자율보다 높은 보상을 지급하는 구조로, 기업의 자발적인 ESG 활동을 촉진한다. 지난해 글로벌 채권시장이 전반적으로 위축된 가운데, SLB 시장은 전년대비 21% 증가세를 보였다.
김현수 대한상의 경제정책팀장은 "첨단산업에 대한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지금, 기업이 경영전략을 보다 세밀하게 수립하려면 기업자금이 안정적으로 보급돼야 한다"며 "기업이 시장을 통해 적기에 자금공급을 받을 수 있도록 자본시장의 성장 기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