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금융사]'2008년 美 모기지 사태' 닮은 中 부동산 위기

美연방정책 집 소유 전폭 지원
차용인 적합성·부동산 가치 조사 안해
채무불이행에 은행 파산, 세계경제 붕괴 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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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중국의 부동산 위기가 심상치 않다. 중국의 위기는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닮았다.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제대로 된 정책을 집행해야 할 순간이다.


2008년에도 내내 심각한 금융 위기의 신호가 꾸준히 깜박거리고 있었다. ‘대공황 이후’라는 문구가 뉴욕 타임스에 그해 첫 8개월 동안 두 배 더 자주 등장했다. 9월15일 드디어 대재앙이 터져, 극적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멍한 표정의 리먼 브러더스 직원 수백명이 맨해튼 7번가 보도로 쏟아져 나왔다. 몰려드는 기자들에게 충격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 소식이 곧 1면의 최신 뉴스가 되었다. 158년 역사를 자랑하는 월스트리트의 보루였던 투자은행이 파산한 이유는 부동산 거품을 초래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때문.

당시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위기의 원인을 분석하는 대신 "미국 금융시스템이 리먼 사태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위험한 금융회사를 구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그저 용기를 북돋을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욕망에 망가진 미국 금융시스템은 전 세계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었고, 미국 금융 위기는 결국 전 세계적 경제 붕괴를 촉발했다.


당시 미국 금융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는 아메리칸드림이 너무 쉬운 신용으로 판매되었다는 것이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수 세대 동안 미국 번영의 상징적 초석이었던 주택시장에서 시작되었다. 연방 정책은 미국 정부가 모기지 시장을 지원하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주택 소유에 대한 아메리칸드림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아이 빌(GI Bill·제대군인 지원법)’을 통해 재향군인에게 저렴한 주택 융자를 제공했다. 정책입안자들은 도시 주변의 개발되지 않은 땅을 새집으로, 새집을 새 가전제품으로, 새 진입로를 새 차로 채우려 했다. 그래야 전쟁 전의 침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새로운 구매는 새로운 일자리와 다음 세대를 위한 안전을 의미했다.


모기지 시장이 폭발할 때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국 금융 및 경제 위기의 원인에 관한 국가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2001~2007년 주택담보대출 부채는 과거의 모든 부채만큼 증가했다. 거의 동시에 집값은 두 배로 뛰었다. 전국적으로 모기지를 파는 세일즈맨이 등장해 미국인들이 주택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빌리도록, 심지어 미래의 주택을 빌리도록 하기 위해 서둘렀다. 세일즈맨은 차용인의 적합성이나 부동산 가치를 조사하지 않고도 이러한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모기지는 점점 더 위험한 투자로 변해갔다.

대출 기관은 이러한 모기지를 계속해서 판매했다. 은행가들은 그것들을 증권으로 묶고, 수익을 열망하는 기관 투자가들에게 팔았다. 모기지 소유자는 종종 수천 마일 떨어져 있고 그들이 무엇을 샀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신용 평가 기관이 적어도 대공황 이후 주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안전하다고 말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은행은 모기지를 증권으로 전환해 파생상품처럼 판매해 수익률을 높였다. 2001년 9월11일 테러 공격 이후 경기 침체를 피하기 위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저금리를 채택했다. 그 이후 일반 투자는 많은 수익을 내지 못했고, 그래서 저축자들은 더 나은 수익률을 추구했다. 더 높은 수익에 대한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국 금융 부문은 모기지 지불로 뒷받침되는 증권을 개발했다.


신용평가 기관은 처리된 모기지 상품에 미국 재무부 채권 수준의 높은 신용등급을 부여했다. 그리고 금융기관은 수십 년 전의 데이터와 추세를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미국인들은 과거에 거의 항상 모기지 비용을 지불했고, 은행은 이러한 데이터와 추세에 의존했다. 문제는 미국 법률과 규정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21세기 초 금융 환경은 대공황 이후보다 대공황 이전의 미국과 더 비슷해 보였다. 대공황 이후의 엄격한 은행 규제가 서서히 사라진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통해 상업은행과 저축자들을 보호했다. 그런 다음 1933년 은행법(글래스-스티걸법)을 통해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정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정치인들이 규제 완화를 추진했다. 글래스-스티걸법도 점점 실질적 규정이 사라져갔다. 가장 핵심적 조항인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도 1999년 법령에 의해 폐지됐고, 투자 은행은 지나치게 위험한 투자를 감수했다. 의회는 2000년 상품선물 현대화법을 통해 장외 파생상품 규제도 완화했다.


번들 모기지 등으로 투자은행이 부동산 가치의 지속적인 상승에 베팅하여 막대한 단기 이익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부채를 팔았고, 심지어 임시자산에도 담보를 두었다. 채무 불이행이 시작되자 모기지 증권은 AAA 신용 등급을 잃었고 은행들은 파산했다.


2008년 3월 투자 은행인 베어스턴스가 도산 직전에서 구원을 받았다. 미국 재무부와 Fed가 JP모건 체이스의 인수 거래를 중개해 부분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9월에는 재무부가 정부 감독 모기지 보험사를 구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그가 지명한 대부분의 사람과 함께 규제 완화의 미덕을 믿었던 보수적인 공화당원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위기가 닥치자 부시와 그의 부관들, 특히 폴슨 재무장관과 벤 버냉키 Fed 의장은 시장을 자유롭게 두는 도박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켄터키주의 짐 버닝 상원의원은 구제 금융을 ‘자유 시장 체제에 대한 재앙’이며 본질적으로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은행, 모기지 대출 기관 및 보험 회사는 갑자기 신뢰할 수 없는 금융시스템이 되었다. 일련의 파산과 합병이 뒤따랐고, 소심한 투자자들은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고수익 투자에서 돈을 뺐다. 공포에 질린 금융업 종사자들은 그들의 유동적인 자금으로 재무부의 채권을 구매했다. 수십 년 동안 미국 정부를 은행에서 몰아내려고 노력한 끝에 결국 미국 정부는 은행가들이 신뢰하는 유일한 기관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자본과 신용에 굶주린 경제는 비틀거리며 긴 침체가 시작되었다.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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