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오펜하이머가 핵무기 책임자로 발탁된 배경은(上)>에 이어
*물리학자 한스 베테는 오펜하이머의 효율적 리더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펜하이머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로스앨러모스는 필요한 성과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훨씬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테고, 열정 없이 일했을 것이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연구원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나는 다른 연구에서 큰 성과를 이뤄낸 경험이 있다. (…) 그러나 로스앨러모스의 경우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한마음으로 일한 적은 없다. 우리는 그때가 우리 인생에서 대단한 시간이었다고 항상 추억한다. 로스앨러모스에서 이뤄낸 공의 대부분은 오펜하이머로 인한 것이었다. 그가 리더였다. 우리는 항상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는 연구소에서 진행되는 사소한 일까지도 머릿속에 항상 잘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적이지 않았고, 무슨 일을 강압적으로 시키지도 않았다. 마치 마음씨 좋은 주인이 손님을 대접하듯,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줬다. 누가 보아도 그는 자기 일을 잘 수행했으며, 그 덕에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일했다."
*1945년 5월 1일, 전쟁장관 헨리 스팀슨은 오펜하이머에게 원자력 정책의 진행 방향을 알리고자 회의를 소집했다. 1주일 뒤 열린 첫 회의에선 기술적 문제를 조언해줄 과학자문단을 구성했다. 오펜하이머를 비롯해 아서 콤프턴, 엔리코 페르미, 어니스트 로렌스 등이 참여했다. 자문단은 일본이 무조건적 항복하지 않으면 1945년 11월 일본 본토에 폭탄을 떨어뜨리기로 합의했다. 오랜 논의 끝에 먼저 무인도에 폭탄을 떨어뜨려 그 성능을 보여주는 것은 무의미하며, 종전을 위해서는 인구가 많은 지역에 직접 투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펜하이머는 훗날 당시 결정을 후회했다. 1962년 남긴 글에 다음과 같이 썼다. "폭탄이 일본에 떨어졌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 당연한 일 같았다. 질문은 많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수많은 논의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 정치적 노력만으로는 극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당시 일본 본토를 침공해 들어가는 전투 계획은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게 자명했다. 50만 명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연합군이 죽고 일본 측에서는 두 배에 이르는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도 나는 폭탄을 무인도에 떨어뜨려 그들에게 경고함으로써 전투나 전란 중에 죽는 사람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펜하이머를 아는 모든 이는 그가 "원자폭탄 개발과 그 사용에 일조한 자신의 책임"을 뚜렷하게 의식하며 여생을 살았다고 전한다.
*전후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는 일흔다섯 살 고령 버나드 바루크를 국제원자력위원회(IAEC) 미국 사절로 임명했다. 오펜하이머는 그가 애치슨-릴리엔솔 보고서(원자력 개발에 관한 국제사회의 모든 위험한 요소를 통제한다는 내용이 주)에서 언급되는 기술적 중요성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에 적잖이 불쾌해했다. 바루크를 만나기 전, 다시 말해 코넌트·스팀슨·애치슨·맥클로이·릴리엔솔 같은 이들과 일할 때만 해도 핵무기 이용이나 원자력을 둘러싼 문제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의 손에서 다뤄지고 있다고 믿었다. 우려대로 바루크는 애치슨-릴리엔솔 보고서를 수정하고 트루먼의 승인을 얻어냈다. 겉보기에는 원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그 안의 정신은 완전히 달랐다. 수정안은 국제기구의 합의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해 거부권에 관계 없이 처벌한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었다. 원안에서 수용된 부분은 일단 국제기구가 설립되고 나면 세계적인 우라늄 자원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가 지금까지 생산된 모든 원자폭탄을 폐기해야 한다는 내용 정도였다. 오펜하이머는 소련이 바루크의 제안을 미국이 원자력 기술을 독점하려는 술책에 불과하다고 여길 것이며, 어느 국가도 자국의 권한을 국제기구에 위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펜하이머가 옳았다. IAEC 회의에 참석한 소련은 바루크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바루크의 애치슨-릴리엔솔 보고서 수정을 저지하기 위해 1946년 6월 9일 뉴욕타임스 매거진 일요일판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우리 제안서의 핵심은 연구와 개발, 평화적인 핵에너지 활용을 모색하는 동시에 원자폭탄 개발로 인한 국가 간 군비 경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국제적 핵 연구 기구를 설립하자는 것입니다." 그는 두 가지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나는 '평화를 위한 원자력 개발과 전쟁을 위한 개발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핵무기를 국제적으로 제어할 만한 적절한 국제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오펜하이머는 인류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국제법으로 세계정부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5년 9월 한 달 동안 에머리 리브스의 '평화의 해부학'에 관해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생각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릴리엔솔은 1946년 7월 23일 오펜하이머와 저녁을 함께 먹으며 새벽 1시 30분까지 대화를 나눴다. 이튿날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뉴욕에서 진행되는 일에 대해 오펜하이머는 깊이 실망하고 있다. 그는 미국 대표단이 우리의 계획(애치슨-릴리엔솔 보고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즉각적인 처벌을 주장하는 바루크와 이에 대한 거부로 계획안의 핵심 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되지 않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가 예상하던 바와 전혀 다르다. 바루크의 제안은 비판 없이 거의 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진짜 토론은 이뤄지지 않았다. 소위원회가 조직돼 실제적인 이행안이 논의되고 있으나 오펜하이머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있다. (…) 오펜하이머는 매력적이고, 똑똑하다. 그러나 상당히 불쌍한 인물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이 첫 핵무기 Joe 1을 실험하고,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승리를 거두는 등 국제 정세가 악화하자 모든 반대를 뿌리치고 미국원자력위원회(AEC)에 하루빨리 수소폭탄을 개발하도록 지시했다.
*미국은 1947년 4월까지 핵폭탄 일곱 개를 보유했다. 1949년 가을에는 200개 이상을 추가 생산했다.
*수소폭탄 제작 초기 오펜하이머는 프로젝트에 큰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소련과 공동으로 테스트나 전략적 무기를 개발하자고 주장했다. 그래서 보안 등급을 박탈당해 핵에 관한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없었고 재판까지 받았다. 당시 AEC 담당 조사원들은 오펜하이머의 심경이 무척 복잡해 과학 자문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할 거라고 보고했다. "자기 생각을 충분히 전달할 만한 설득력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그 능력이 이 나라의 공격적인 군사적 이익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애국심을 의심하진 않았으나 진행 중인 안보 프로그램과 수소폭탄 개발 계획에 아무런 열정을 보이지 않아 그 뒤에도 보안 등급을 회복시켜주지 않았다. 이들은 균형과 방어적 전략, 전략적 핵무기, 공중 방어 시스템에 관해 주장했던 오펜하이머와 달리 수소폭탄 개발을 통한 전폭적인 공격 전략을 추구했다.
*오펜하이머는 AEC 위원회의 심문으로 진행된 최종 판결에서 모든 자격을 박탈당한다. 대질 심문은 로저 롭이 맡았다. 오펜하이머 앞에서 소련에 핵 관련 기밀을 전할 수도 있었다는 다양한 사람들의 진술을 열거했다. 오펜하이머는 허리를 굽히고 손바닥에 '멍청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전해진다.
*청문회에서 새로 밝혀진 사실에는 오펜하이머의 제자들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전쟁이 한창일 때 버나드 피터스, 데이비드 봄, 지오바니 로시, 조셉 와인버그의 정치적 견해가 방사선연구소의 안보에 위험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학생들은 반미활동위원회에 기소됐다. 봄, 로시 등은 공산당 활동과 관련한 조사도 받았다. 이 사건은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저지른 파렴치한 행동으로 보도되곤 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제자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 같이 다뤘다. 실제로 그의 진술 때문에 몇 명의 경력은 완전히 망가졌다.
*자격을 박탈당한 오펜하이머는 항소심을 준비하며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다. 하버드와 케임브리지에서의 아픈 기억이 다시 한번 들춰졌다. 그는 자신의 애국심과 충성심이 실험대에 올랐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과거에는 원자력을 이용한 대량 살상무기 개발에 공헌할 기회를 얻었으나 핵의 평화적인 활용과 소통, 인류 공동의 이해를 위해 전쟁을 억제할 기회를 끝내 얻을 수 없었다.
*오펜하이머의 지위 박탈에 따른 고통과 상처는 1954년 가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1954년 12월 26일 컬럼비아대학 20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출연한 라디오 방송에서 "학문과 과학이 세계적으로 황량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밝혔다. "비록 인문학과 과학이 넘쳐 나지만, 각 학문의 언어와 기술이 분절화돼 과학은 과학대로, 인문학은 인문학대로, 모든 학문이 각자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학문이 마을과 같다고 생각해 보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수많은 마을은 있다. 하지만 서로를 넘나들 수 있는 길은 없는 상태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다양한 영역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오펜하이머는 1945년 4월 로스앨러모스 기념 예배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기념하며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사람은 신념으로 구성된 창조물이다. 고로 누군가의 신념이 곧 자신이다."
*힌두 철학은 오펜하이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버드 재학 시절 원문을 읽진 못했으나 산스크리트 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1932년부터 '바가바드기타'를 번역한 아서 라이더 버클리 교수의 수업을 참관하고, 그 내용을 연구했다. 1933년 10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아주 쉬우면서도 대단한 작품"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펜하이머에게 '바가바드기타'를 소개한 라이더 교수는 이 노래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왕가의 두 형제 가문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을 다룬 위대한 서사시다. 왕권을 두고 시작된 그들의 불화는 결국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온전히 해결된다." 서사시는 용기 있고 궁술에 능한 아르주나 왕자의 전투에서 시작된다. 전차를 타고 가던 아르주나는 맞서 싸울 이들이 자기 친척, 교사, 친구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돌연 싸움을 포기한다. 이윽고 크리슈나에게 자문을 구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바가바드기타'는 명확한 대답을 전한다. "뚜렷한 이유가 있는 전투에서는, 전사여, 친족이더라도 죽여라." 장장 열여덟 장에 걸친 대화에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왜 그가 전투를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지를 설파한다. 일단 군인이기 때문에 싸워야 한라고 종용한다. 또한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르주나가 아니라 크리슈나 자신이며, 아르주나는 '운명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슬퍼하거나 기뻐하면 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크리슈나에게 헌신하면, 그 믿음이 아르주나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바가바드기타'야말로 모든 언어를 통틀어 단일 사건에 대해 가장 아름답게 쓴 철학서라고 극찬했다. 낡은 영문 복사본 몇 권을 책상 위 손에 잡히는 곳에 두었다가 친구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그는 로스앨러모스 근무 시절에도 이 책을 탐독했다. 1945년 8월 트리니티 테스트를 진행할 때도 한 구절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죽음이 되었고, 온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1950년대 초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함께 산책하던 오펜하이머에게 말했다. "자네가 일단 무언가 합리적인 업적을 이루게 된다면, 이후 삶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생길걸세."
*물리학자 이시도어 라비는 1967년 오펜하이머를 위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2차 대전 이전에 오펜하이머의 명성과 영향력은 물리학이라는 작은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시에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서 그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대단한 연구소와 지휘자, 다른 물리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처럼 많은 관심을 받은 사람은 없다. 수많은 과학자 가운데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 뒤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부상했다. (…) 자연스럽게도 오펜하이머 어깨에 모든 권위가 실리게 됐다. 예컨대 어니스트 로렌스, 해럴드 유리, 아서 콤프턴, 리 두브리지, 제임스 코넌트 등이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나 오펜하이머의 리더십이 미치는 범위만큼은 아니었다. 그가 누렸던 과학적 영예는 엄청난 것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을 물리학자라고 칭하며 물리학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946년 뒤 전혀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는 1956년 자신을 "전문적인 물리학자로서, 전혀 생동감 없이 늙어 빠진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양자물리학과 고에너지물리학 영역의 최신 연구 경향에 관한 관심을 잃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거나 더 넓은 이론물리학 커뮤니티에 몸을 담그지 않았다. 시대를 대표하는 물리학자이자 물리학계의 아웃사이더였다.
*오펜하이머에게 과학은 욕망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였다. 그가 동생에게 보낸 1932년 3월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간편함만 추구하는 환경에서 귀중한 행복들은 멀어져만 간다. 우리는 훈련을 통해 평온함을 얻을 수 있다. 세상은 포기해 버렸지만, 성육신이나 자비와 같이 초월적으로 활동하면 소중한 자유가 주어진다. 훈련을 통해 우리는 개인적 욕망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왜곡 속에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지구가 처한 공포의 상황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다. (…) 훈련이란 그 속성상 우리의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이뤄진다면 결국에는 더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 것이다. 그 대상이 되려면 공부는 물론 인간 복지를 위한 의무, 전쟁, 개인적 고난, 생존을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구들까지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최소한의 초월함을 경험하고 평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하버드와 버클리에서 베다(고대 인도의 종교, 신화, 철학, 우주관, 사회상을 보여주는 인도 최고의 문헌)를 공부하며 초월성, 훈련, 성육신에 관한 사상을 알게 됐다.
*오펜하이머는 카리스마적 기질을 발휘해 버클리와 칼텍으로 거액의 연구 기금을 끌어올 수 있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성공적으로 업적을 이뤄 내는 데에도 그의 카리스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일 대 일의 관계에서보다 일 대 다(多)의 관계에서 발산했다.
*오펜하이머의 딸은 자살했다. 그는 비극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며 불굴의 의지로 이겨 냈다.
*1954년 재판 결과에 따라 오펜하이머가 해임되자 동료 물리학자들과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그를 갈릴레오나 드레퓌스와 같이 추락한 영웅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는 말하면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구사하는 문체는 모호하고 복잡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간결하고 경제적으로 직설적인 문체를 사용한 아인슈타인과 대조됐다.
*오펜하이머는 1928년 리든 국립연구소에서 파울 에렌퍼스트를 도와 연구 활동을 진행했다. 에렌퍼스트는 오펜하이머를 취리히에 있는 볼프강 파울리에게 보내며 이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오펜하이머의 대단한 재능을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성격을 고치는 게 급선무입니다." 에렌퍼스트는 파울리가 그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1929년 2월 파울리는 에렌퍼스트에게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오펜하이머는 취리히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과학적 능력이 발현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무궁한 상상력에서 나오는 다양한 아이디어는 분명 그의 장점입니다. 그러나 너무 쉽게 만족해 버리는 단점이 있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보다 남들의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합니다. 불행히도 그는 제가 하는 말이면 그 어떤 말이라도 절대적인 진리로 생각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좋지 않은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그의 약점을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훗날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권위를 필요로 하면서 복종하는 특유 성향을 눈여겨보고 그를 로스앨러모스 책임자로 내세웠다.
*머레이 켐프턴은 1954년 원자에너지에 관한 임무를 수행하던 오펜하이머의 행동을 분석한 바 있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자신 위의 권위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저자 실번 S. 슈위버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 '학습, 사람에 대한 의무, 국가, 전쟁, 개인적인 고난 등을 통해 우리는 훈련된다'라던 오펜하이머의 철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다.
*버클리 시절 오펜하이머에게는 멜바 필립스, 아놀드 노드시크, 웬델 푸리, 윌리스 램, 로버트 서버, 필립 모리슨, 레오나르드 시프, 조지 볼코프, 조셉 켈러, 시치 쿠사카, 하틀랜드 신더, 줄리언 슈윙거, 시드니 단코프, 버나드 피터스, 에드워드 제르조이, 레슬리 폴디, 데이비드 봄 등 수준급의 학생들과 박사급 연구자들이 있었다. 로스앨러모스 시절도 다르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의 수재들이 가득했고, 연구 주제는 우라늄 생산과 플루토늄 폭탄 제작으로 명확했다. 연구소 책임자로서 그는 노벨상 수상자부터 학생 연구자까지 모든 연구원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전후 정부를 위해 일하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 코넌트, 엔리코 페르미, 이시도어 라비, 시릴 스미스 등 미국원자력위원회(AEC) 상임이사회 구성원들과 조지 마셜, 딘 애치슨, 바네바 부시, 데이비드 릴리엔솔, 윌리엄 클레이턴 등 정부 측 고위 인사들은 하나같이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며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임무 또한 소련과 미국 사이의 정치, 군사적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일시적인 협정을 이뤄내는 것으로 분명한 편이었다. 음악에서 메타포가 합주를 위한 것이라면, 오펜하이머는 각각의 뛰어난 연주자가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교향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에도 위계질서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물리학자에게 가장 위대한 실험이 우주에 관한 보편적이고도 기본적인 법칙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봤다. 그는 모든 자연현상, 인생의 기원까지도 과학적으로 밝히는 것이 가능하다고 봤다. 오펜하이머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세상에 관한 수많은 지식이 서로 끊임없이 연계됐다가 변화하기 때문에 시대를 넘어서는 이론은 '근본적인' 수준에서만 존재한다고 봤다. 두 사람의 차이는 양자물리학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양자물리학을 통해 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를 밝힐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아인슈타인은 계속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반면 오펜하이머는 닐스 보어의 이론을 지지하는 편에 섰다. 1950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쓴 '1900~50년대 과학에 바치는 헌사'에 다음과 같이 썼다. "원자로 구성된 세상이지만 단일한 물질만을 상대로 하는 한 가지 모델을 토대로 전체의 원자 시스템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오펜하이머는 양자물리학이 더 미시적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깊고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고 믿었다. 미시 세계에 대한 어떠한 새로운 이론이 나온다고 해도 결국에는 양자물리학이 이미 제시한 명확한 결론을 더욱 확고하게 해줄 것이라고 봤다. 보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다양한 의문이 서로 다른 영역, 특히 생물학과 정신분석학, 각종 문화적 질문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상보성'의 확장으로 인해 자연과 과학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다양하고 섬세한 논증의 요소들이 새롭게 더해지게 됐다고 봤다.
*오펜하이머는 집단주의를 중요시한다. 슈위버는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에서 대표적인 예로 1958년 데이비드 릴리엔솔과 일화를 소개한다. 임원 회의를 진행하던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오랫동안 군비 축소에 관해 고민해온 것을 설명하고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의논해 볼 것을 제안했다. 회의 뒤 오펜하이머는 릴리엔솔에게 말했다. "함께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이번 회의는 특별하고 결실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함께 학생의 자세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지요. 바로 이런 기회를 통해 당신의 천재성이 그룹에 녹아들 수 있는 겁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라는 결과에 아인슈타인은 큰 역할을 하지 않았으나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의 대답에는 일종의 후회와 함께 독일로부터 느꼈던 위협이 꼭 들어가게 된다. "저는 원자폭탄의 생산과 관련된 연구에는 전혀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이 분야에 제가 공헌한 바가 있다면 1905년 자연의 일반적인 물리학적 성질과 대량 에너지의 상관관계에 대해 정립한 것이 전부입니다. 군사적인 잠재성에 관한 생각은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폭탄에 관해서는 1939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그런 폭탄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과 독일도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린 것뿐이었습니다. 독일이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는 분명한 징후가 있었기에 저로서는 해야 할 의무를 다한 것이었습니다. (…) 독일이 모든 힘을 다해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고 믿었기에 저는 촉박함을 느꼈습니다. 항상 평화주의를 지향하지만, 당시 다른 대안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54년 11월 프린스턴을 방문한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을 만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도록 추천한 일은 내 평생을 두고 후회할 실수라네. 그렇지만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했다네"라고 말했다. 그는 죽기 몇 주 전에도 물리학자 막스 폰 라우에에게 비슷한 말을 남겼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은 TNT 10킬로톤에 맞먹는 파괴력으로 온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해 연말까지 히로시마 주민 약 14만 명이 죽었고, 5년 동안 죽은 사람은 20만 명에 달했다. 원폭이 떨어진 사흘 뒤 나가사키에서는 또 다른 플루토늄 폭탄이 터졌다. 도시는 초토화됐고, 1945년 말까지 약 7만 명이 사망했다.
*아인슈타인은 나가사키 폭격 소식을 듣고 "고대 중국의 격언이 맞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를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유일한 지혜는 아무 일도 벌이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 아무 일도 벌이지 않는 것이 진짜 지혜지요." 그가 가리킨 중국 격언은 도가 사상이었다.
*로스앨러모스 과학자들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실제적 결과와 그 파괴 정도를 자세히 전해 듣고 나서 "예상하지 못한 강력한 폭발"이라며 놀라워했다. 몇몇은 죄책감에 시달려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이들은 나치 독일이 먼저 미국이나 영국에 핵 공격을 퍼붓는 경우에나 보복을 위해 원자폭탄이 사용되리라 믿었다. 즉 사용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폭탄을 사용할지 말지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1946년 초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는 국무차관 딘 애치슨을 수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조직했다. 미국이 생각하는 핵무기 철폐 방안과 평화적 활용을 원자력위원회에 제안하도록 지시했다. 위원회에는 그로브스, 부시, 코넌트, 존 맥클로이 등이 참여했다. 고문단장은 당시 테네시 공공사업단장을 맡고 있던 릴리엔솔, 과학자문단장은 오펜하이머가 맡았다. 오펜하이머는 1946년 3월 발표된 애치슨-릴리엔솔 보고서의 핵심적인 부분을 기획했다. 제안한 골자는 개별 국가의 정부가 무분별하게 핵에너지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핵 사찰 시스템을 고안해 적절한 안전망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1949년 10월 오펜하이머가 의장으로 있던 AEC 고문단은 정부에 수소폭탄 제작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말 것을 한목소리로 제안했다. 수소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보다 약 1000배 강력했다. 이들의 만류에도 트루먼 대통령은 수소폭탄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수많은 대중은 물론 과학계는 술렁였다. 일부 과학자들은 자살 행위라며 제작을 거부했다.
참고 자료 : 실번 S. 위버 지음·김영배 옮김·발행처 시대의창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2013)', 카이 버드 & 마틴 셔윈 지음·최형섭 옮김·발행처 사이언스 북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2010)',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정철 & 강규형 옮김·발행처 에코리브르 '냉전의 역사(2010)', 리처드 로즈 지음·문신행 옮김·발행처 사이언스북스 '원자폭탄 만들기 1·2(200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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