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 손 들어준 美 법원…가상자산 증권성 판단 새 국면?

테라폼랩스 소송 관련 ‘코인 증권성 따져볼 가치 있다’ 판단
업계 “가상자산 증권성 여부 최종 판단 아냐…영향 크지 않을 것”

이미지출처=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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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상자산의 증권성 여부를 두고 서로 다른 견해가 나와 시장이 주목하고 있다. 가상자산 리플 발행사가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와의 소송전에서 사실상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온 후 SEC에 유리하다고 해석될 수 있는 판단이 나오면서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 제드 레이코프 판사는 지난달 31일 테라폼랩스와 설립자 권도형이 SEC가 제기한 소송을 기각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앞서 지난 2월 SEC는 테라폼랩스와 권도형에 대해 미등록 증권 제공·판매로 사기를 벌인 혐의 등으로 제소했다. 테라폼랩스 측은 스테이블코인인 테라USD 등 자신들이 발행한 가상자산이 증권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이번 결정으로 사기 등의 혐의 재판은 그대로 진행될 예정이다.

결국 레이코프 판사는 테라폼랩스 측의 요청을 기각하면서 가상자산이 증권이라고 판결한 것은 아니지만 소송을 제기한 SEC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SEC의 주장대로 소송을 진행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레이코프 판사는 "판매 방식에 따라 증권 여부를 구분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했다. 이는 리플 판결을 반박한 것이다. 지난달 13일 미 뉴욕지방법원 아날리사 토레스 판사는 '리플이 그 자체로 증권인 것은 아니다'라고 약식 판결했다. 그러면서 "리플랩스가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일반 투자자들에게 (리플을) 판매한 것은 연방 증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라며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일반 투자자 대상 판매는 투자자들이 리플의 이익에 대해 합리적인 기대를 할 수 없었다"고 판시했다. 또 "투자자들은 자신이 지불한 돈이 리플랩스로 가는지, 다른 판매자에게 가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라며 덧붙였다.


다만 헤지펀드 등 기관 투자자들에게 리플을 판매한 것에 대해선 리플에 증권성이 인정된다고 봤다. 토레스 판사는 "기관 투자자에 대한 리플의 판매는 투자자들이 리플 가격 상승을 기대했기 때문에 투자계약에 해당한다"라며 "이에 따라 이 경우 연방 증권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선 증권성 여부를 판단할 때 하위테스트(Howey Test)를 활용한다. 하위테스트는 ▲돈을 투자했는가 ▲투자하면서 수익을 얻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는가 ▲다수가 투자한 돈이 공동 기업에 속해 있는가 ▲수익은 자신의 노력 대가가 아닌 돈을 모으는 자 혹은 제3자의 노력의 결과에서 비롯되는가 등에 모두 해당할 경우 증권성이 있다고 결정한다. 가상자산의 증권성 여부에 대해서도 하위테스트가 적용된다.

토레스 판사는 기관 상대 리플 판매는 투자계약증권 판매로 봤다. 특히 하위테스트 4번째 조건과 같이 리플랩스로부터 직접 매수한 기관은 리플랩스의 노력에 따른 가치 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거래소를 통한 일반 투자자의 매매는 매도자와 매수자가 서로를 알지 못하고 매매 자금이 리플랩스뿐만 아니라 다른 매도자에게 유입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관 투자자와 동일하게 리플랩스의 노력에 따른 가치 상승을 기대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와 같은 판결은 리플에 대해 증권성이 없다고 단정한 것은 아니지만 리플에 증권성이 존재한다는 SEC의 주장과는 달라서 사실상 리플랩스가 이번 소송에서 사실상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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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달리 레이코프 판사는 하위테스트에선 구매자가 누구냐에 따라 증권성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토레스 판사를 겨낭해 "유사한 사건에서 이 지역의 다른 판사가 최근 채택한 접근 방식을 거부한다"고 반박했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레이코프 판사의 이번 결정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진 않다. '가상자산이 곧 증권'이라고 최종 판결한 것이 아닌 앞으로 테라폼랩스와 SEC 간의 소송을 할 가치가 있다고 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해당 사건에서 SEC가 승소해 증권성이 인정되더라도 이것은 테라폼랩스와 관련된 가상자산의 증권성 판단에만 국한될 뿐 다른 코인에 대해서는 다시 증권성 판단을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는 "리플 소송에서의 핵심은 SEC가 주장하는 것을 법원이 다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고, 리플이 항상 증권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인데 리플은 증권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라며 "마찬가지로 이번 테라폼랩스 관련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테라폼랩스 측과 SEC 간의) 소송이 진행 중이고, 어떤 결론도 나오지 않았으며 지금 증거 수집 절차도 끝나지 않았다"라며 "이번 결정이 의미를 갖는 것은 리플 사건을 그대로 원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리플 사건) 항소심에서 다른 판사가 레이코프 판사와 같은 생각을 해 리플 판결이 뒤집어지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우려를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고 말했다.


가상자산의 증권성이 코인 시장에선 중요 이슈인 만큼 국내에서도 금융당국과 거래소 등이 움직이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2월 국내 유통 중인 가상자산의 증권성 판단을 지원하기 위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현재 거래소가 가상자산의 증권성 여부를 검토한 후 해당 사항이 없는 경우 상장하고 있다. 금감원 TF는 증권성 판단이 어려운 경우 거래소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가상자산의 증권성 여부는 백서만 아니라 마케팅 자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의 홍보, 발언 등까지 따져야 한다. 국내에선 자본시장법상 증권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그 분류를 나열하고 있으며 통상 미국보단 증권성을 더 좁게 해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기존에 없던 거래이기 때문에 새롭게 가상자산의 증권성을 판단하는 방법 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새로운 가상자산 관련 상품이 나올 경우 거래소가 판단을 해야 하므로 역량 강화를 위해 지원하는 것에 조금 더 치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전형적인 증권과 달리 (가상자산의 경우) 사업 내용도 각기 다르고 살펴봐야 하는 것도 많아서 증권성 점검을 위한 체크리스트 마련에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며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데 거래소 등과 머리를 맞대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내 5대 원화마켓 거래소 고팍스, 빗썸, 업비트, 코빗, 코인원으로 구성된 디지털자산거래소공동협의체(DAXA·닥사)도 증권성 여부 판단을 가상자산 상장 가이드라인 주요 항목으로 설정했다. 닥사 관계자는 "가상자산 증권성 판단과 관련해 다양한 사례를 검토하고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윤 기자 leejuyo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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