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X파일]유권자 숟가락 숫자도 머릿속에…전설의 지역구 관리

22. 지역구 관리의 바이블로 불린 정치인
이재오, 김문수, 우상호 등이 대표적
만만찮은 지역구서 다선 의원 공통점

편집자주‘정치X파일’은 한국 정치의 선거 결과와 사건·사고에 기록된 ‘역대급 사연’을 전하는 연재 기획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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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들, 다음 주에 결혼하죠? 좋으시겠어요, 그날 날씨도 좋다던데.” “어렸을 때부터 공부 잘하던 따님이 대학에 떡하니 합격했다면서요, 정말 대단합니다.” “요즘 다리는 좀 어떠세요, 지난번에 무릎 수술 하고 좀 나아지셨어요?”


지역구 관리에 도가 튼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가정사까지 꿰뚫는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명함 전하고, 악수 한 번 한다고 해서 맺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낮이고 밤이고 발로 뛰고 또 뛰는 시간들, 그런 세월이 오래도록 축적돼야 가능하다.

정치를 쉽게 생각하는 정치인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뉴미디어 발달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유튜브 등을 활용해 자기를 홍보하는 게 주력인 정치인들이 대세가 되고 있지만, 지역구 관리의 기본은 여전히 땀내 나는 발이다.


이재오 국민의힘 고문이 서울 광화문 근처 사무실에서 자신의 쓰기와 걷기와 정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이재오 국민의힘 고문이 서울 광화문 근처 사무실에서 자신의 쓰기와 걷기와 정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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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정당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지역구 관리의 달인들이 있다. 어느 골목의 누구네 유권자 가정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안다는 그런 전설….


지역구마다 유권자가 20만명 안팎에 이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물론 모든 이의 가정사를 꿰뚫을 수는 없다. 하지만 본인이 몇 번이고 골목을 오가고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사연을 접하고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러한 정치인이 될 수 있다.

지역구 관리에 충실한 정치인들의 공통점은 부지런하다는 점이다. 어지간히 부지런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루 일과시간이라는 개념조차 모호하다. 눈을 뜰 때부터 잠이 들 때까지가 유권자와 호흡하는 시간이다.


정당의 주요 당직을 맡아 각종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국회 본회의, 상임위원회 회의를 챙기다 보면 24시간이 모자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잠은 턱없이 부족하고 일정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이 일상이다.


대중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회의원은 한가하게 권력 놀음만 하는 직업이 아니다. 남이 일할 때는 똑같이 국가 현안에 대한 국회의원 역할을 하고, 정책개발과 의회정치에 임해야 한다. 남이 쉬고자 하는 시간에는 지역구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듣고 전하며 호흡해야 한다.


일반인이 한 참 잠이 들어 있을 시간이나 주말, 휴일 등은 그들에게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을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업무 시간이다.


여의도 정가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지역구 관리의 달인들은 누가 있을까. 2024년 제22대 총선 출마 가능성이 없거나 낮은 인물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정치의 뜻을 접었다기보다는 다른 역할을 맡고 있거나, 새로운 영역의 정치를 모색하는 이들이다.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이 1월30일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이 1월30일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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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인물은 국민의힘 이재오 상임고문과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 그리고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른바 ‘밭’이 좋지 않은 지역에서 다선 의원으로 성장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선수 쌓기는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지역의 선수 쌓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재오 상임고문은 민주당 강세 지역인 서울 은평에서 5선 국회의원이 된 인물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권력 2인자 소리까지 들었던 거물인데 여의도 정가에서 유명한 것은 그의 부지런함이다.


궂은날이건 어두운 시간이건 가리지 않고 지역구를 돌고 또 돌았다. 자전거를 이용해 지역구 곳곳을 누비는 거물 정치인. 동네 목욕탕과 이발소 등은 그의 단골 방문지다. 분명히 TV에서 봤던 높은 양반인데 자기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면 유권자는 마음을 열기 마련이다.


정치인 이재오는 그렇게 은평구에서 5선 국회의원으로 성장했다. 2012년 제19대 총선 때는 서울 은평을에 출마해 49.5% 득표율로 당선된 일이 있다. 당시 은평을 선거의 화제는 천하의 이재오를 상대로 통합진보당 천호선 후보가 48.4%를 득표한 것이었다.


당선자보다 낙선자가 주목받은 것은 역으로 이재오의 벽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치인 이재오는 2017년 이후 출마를 멀리하고 있지만, 각종 미디어에서 정치 원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윤동주 기자 doso7@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윤동주 기자 dos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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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이재오만큼이나 지역구 관리로 유명한 인물이 김문수 경사노위원장이다. 지역구 곳곳을 누비며 유권자들을 만나고 또 만나는 모습은 유명했다. 정치인 김문수는 보수정당의 험지로 여겨지는 부천 소사(현재는 부천시병 지역구)에서 철옹성 같은 지지세를 쌓았다.


2000년 제16대 총선 당시 부천 4개 지역구 가운데 3개는 새천년민주당이 당선됐다. 하지만 김문수 후보가 출마한 부천 소사는 61.6%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한나라당이 승리했다. 부천 출마 후보 가운데 최고 득표율의 주인공이었다.


부천 소사는 정치인 김문수가 있을 때는 민주당이 넘기 어려운 산이었는데, 김문수 후보가 출마하지 않게 되면서 민주당의 강세 지역이 돼 버렸다.


민주당 쪽에서는 우상호 의원의 지역구 관리가 유명하다. 여전히 현역 의원인 우상호 의원은 오랜 세월 지역구 관리를 한 경험을 토대로 유권자들과 밀착 호흡을 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민주당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서울 서대문에서 4선 고지를 밟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유권자 가정집의 숟가락도 머릿속에 있다는 전설의 정치인들은 모두 20년 이상의 정치 경험을 지닌 이들이다. 시대 흐름의 변화 때문에 유권자들이 자주 이사를 하게 되면서 한 동네에 30년, 40년씩 사는 이는 줄어들었다. 정치인이 유권자들과 인연을 쌓아도 다음 총선 때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얘기다.


정치를 너무 쉽게 보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미지 정치만 잘 활용해도 다음 총선에 당선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밤잠을 줄여가며 지역구 관리에 매진하는 정치인은 점점 소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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