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를 진행하는 황선우 작가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와 '아무튼, 술' 등의 에세이를 선보인 김혼비 작가의 서간문이다. 주제는 번아웃과 과로. 종일 피로와 무례에 시달렸음에도 너무 고단해서 오히려 잠들 수조차 없던 어느 힘겨운 밤에 대한 기록, 일상의 단어들을 자꾸만 잃어버려 건망증을 의심하면서 막막하게 머릿속을 뒤적여보던 어떤 날들에 대한 이야기 등을 전한다. 그리고 끝내 다정과 우정을 통한 회복으로 번아웃으로부터 회복에 이르는 길을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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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작년 겨울부터 저에게서 번아웃의 기미를 알아보고 경고했는데도 잘 모른 채 번번이 번-번-번- 타들어가다가 올여름에 ‘아웃’이 되어 나가떨어지고서야 받아들였어요. 번아웃이 맞구나. 사흘이면 끝낼 일을 열흘 걸릴 때부터 이미 그랬구나. 이게 뭐라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을까요. (…) 번아웃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번아웃이 일 효율을 깡그리 앗아가는 통에 한 번 붙든 일이 끝나질 않아 마음놓고 놀거나 쉴 시간까지 사라지는 게 가장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휴식과 저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다리마저 불태워 없애버리는 게 번아웃이더군요. - 김혼비, ‘번-번-번- 타들어가는 날들’ 중에서(62~63쪽)


언젠가는 한동안 씻는 동안 서 있을 힘이 없어서 욕조 안에 가만히 앉은 채로 샤워를 하곤 했어요. 기운이 더 떨어질 때는 물을 맞으면서 아예 누워버리기도 하고요. 그렇게 젖은 미역같이 널브러져 있다가 정신을 좀 차리고 나면 욕조 밖으로 나와 몸을 닦고 말릴 기력이 조금 생겼습니다. 한두 달 뒤인가, 샤워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그제야 깨달았죠. 아, 그때 내가 좀 이상했구나. 사람이 아닌 미역이었구나. 고갈된 것이 체력이거나 사회성이거나 집중력이거나 하여간 바닥을 드러낸 채로 꾸역꾸역 계속하고 있었구나. 저 같은 사람들은 멈추는 방법을 몰라서 계속하곤 합니다. - 황선우, ‘젖은 미역의 시절을 보내는 법’ 중에서(70쪽)

다정함이란 어쩌면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마음을 쓰는 일이겠지요. 혼비씨가 지하철 앞에 선 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그분이 소리쳐 혼비씨를 깨워주는 풍경처럼 말이죠. (…) 우리가 서로 편지를 보내지 않는 기간에도 분명 혼비씨는 그런 장소에서 지내고 있을 거란 믿음이 들어요. - 황선우, ‘알프스의 할미꽃 두 뿌리’ 중에서(197쪽)


회복의 한 절반쯤 왔을까요. (…) 매달마다 어서 나가 놀다 오라고 제 등을 힘껏 밀어준 선우력과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 있게 삶을 챙기는 선우씨의 모습이 늘 담겨 있는 편지의 힘이 아주 컸습니다. (…) 한 시절 저의 든든한 절기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혼비, ‘여름이야, 나가서 놀자’ 중에서 (206~207쪽)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 황선우·김혼비 지음 | 문학동네 | 220쪽 | 1만5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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