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정담]"난타, 35년 '오페라의 유령' 말고 70년 '쥐덫'처럼 오래 가길"

'난타' 제작 송승환 PMC프로덕션 대표 인터뷰
대학로 놀이터 삼아 성장…걸으며 무념무상 좋아
"한적한 오솔길 걷듯…노역배우로 마무리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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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현지시간)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래 공연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막을 내렸다. 1988년 1월26일 초연한 지 약 35년 3개월(코로나19 중단 기간 포함) 만이었다.


국내에서 장기간 무대를 이어가고 있는 대표 공연은 ‘난타’다. 1997년 10월 호암아트홀에서 초연한 뒤 26년 넘게 장기 공연 중이다. 지난 19일 대학로에서 난타 제작자 송승환 PMC 프로덕션 대표(66)를 만났다. 송 대표는 ‘오페라의 유령’ 폐막 얘기에 "영국 웨스트엔드에서는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의 연극 ‘쥐덫’이 70년 넘게 계속 공연 중"이라고 했다. 머쓱했다. 쥐덫은 1952년 11월25일 초연했다. 1974년 3월23일 세인트마틴 극장으로 무대를 옮긴 뒤에는 햇수로 50년째 같은 극장에서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송 대표는 삶의 무대에서 배우, 공연 제작자, 교수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배우 같은 삶을 살았다. 송 대표는 그동안 너무 바쁘게 뛰어다니며 살았다며 이제는 잡다한 일을 내려놓고 배우로서 천천히 걷고 싶다고 했다. 다만 난타만은 자신보다 더 오래 나아가길 바랐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대신 걸어서 부산까지

송 대표가 평소 점심을 먹은 뒤 자주 걷는다는 대학로 길을 함께 걸었다. 그의 사무실에서 단골 카페까지였다.


보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학로를 놀이터 삼아 성장했다. 보성중학교가 지금은 송파구로 옮겼지만 송 대표 재학 시절에는 혜화동 로터리에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보도블록에 원래 청계천으로 흐르는 개천이 있었다. 중학교 때 수업 끝나고 이 개천가에서 물장난 하면서 종로 쪽으로 걸어갔던 추억이 있다. 당시에는 인도가 좁고 개천이 넓었다. 그때 서울대 문리대가 혜화동에 있었는데 서울대생들이 개천을 혜화동 센강이라고 했다."

송 대표는 "걷는 게 좋다"고 했다. "한때 800㎞에 이르는 순례길로 유명한 스페인 산티아고를 꿈꿀 정도였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를 진행할 때였다.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씨(현 제주올레 이사장)가 초대손님으로 나와 며칠 동안 산티아고 얘기를 했다. 너무 가고 싶었다."

송 대표는 ‘여성시대’를 2004년 3월부터 2007년 3월까지 꼬박 3년간 진행했다. 여성시대 진행을 끝내자마자 산티아고로 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위독해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배낭 사고, 준비를 다했는데 한국을 떠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산티아고는 못 가겠고 그러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걷자고 생각했다. 교보문고에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길 100개를 뽑아놓은 책을 샀다. 그 책을 따라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까지 전국을 일주하며 약 40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오지게 걸었다."


송승환 PMC프로덕션 대표가 1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일대를 걷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송승환 PMC프로덕션 대표가 1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일대를 걷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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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까지 걸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송 대표는 무념무상을 얘기했다. "처음에는 인생을 한 번 정리해 보겠다고 생각했는데 닷새 걷고 나니까 발에 물집이 생기기 시작하고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그냥 이 물집을 어떻게 해야 되나, 언덕이 나오면 또 어떻게 올라야 되나, 오후에 걸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여름이었는데 날씨가 엄청 더웠다. 나중에는 내 의지 없이 발이 스스로 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좋았다. 그냥 무념무상으로 걷는 게."


송 대표는 여전히 걷는다. "원래 야행성이었는데 나이 들면서 바뀌었다. 요즘은 밤 10시면 잠들어 5시쯤 일어난다. 집사람은 8~9시에 일어나니까 5시부터 한 서너 시간이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다. 책이나 영화를 볼 때도 있지만 여의도 공원을 걸을 때도 있다.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 걸린다. 이어폰 꽂고 음악 들으면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그냥 하늘 보고 나무 보고 그게 좋다."


데뷔 60주년에는 살리에리를

송 대표는 애초 지난 2월부터 4월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한 연극 ‘아마데우스’에 출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3월 말까지 촬영한 KBS 드라마 ‘삼남매가 용감하게’와 겹치면서 연극 출연을 포기했다. "드라마가 끝날 무렵에 아마데우스가 시작해서 체력적으로 좀 힘들었다. 그래서 아마데우스는 내후년에 하기로 프로덕션이랑 다시 얘기를 했다. 2025년은 마침 데뷔 60주년이 되는 해여서 하고 싶었던 역을 하면 의미있겠다 싶었다."


송 대표가 아마데우스에서 하고 싶다고 한 역은 살리에리다. 다양한 영화와 극에서 모차르트와 비교됐던 인물이다.


아마데우스는 영국 극작가 피터 셰퍼(1926~2016)가 1979년에 발표한 희곡이다.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를 주인공으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이야기를 다룬다. 송 대표는 아마데우스를 두 번 공연했는데 모두 모차르트 역이었다.


"모차르트를 할 때마다 살리에리를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셰퍼의 작품 중에서 나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작품이 ‘에쿠우스’인데 에쿠우스에서는 20대 때 주인공 알런을 연기했고 50대 때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 역할을 했다. 에쿠우스에서는 젊은 주인공과 늙은 주인공을 모두 했다. 아마데우스도 젊은 주인공을 했으니 늙은 주인공도 해 마무리를 하고 싶다."


송 대표는 나이가 들면서 노역에 관심이 많아졌다며 "배우가 좋은 게 늙어도 노역을 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최근 이안 매켈런(84)이 출연한 영화 ‘굿 라이어’를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배우는 나와 다른 캐릭터를 할 때가 재미있는데 매켈런이 사기꾼으로 나온다. 굿 라이어를 연극으로 만들어도 재미있겠다 싶어 출판사를 통해 원작자에게 저작권 문의를 하고 있다."


다만 송 대표는 앞으로 제작자로서는 소극장 연극 한 편 정도 기회가 되면 만들고 배우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위험 부담이 큰 제작 일에 지치기도 했고 나빠진 시력 때문에 제작자를 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의 시력은 2018년부터 급속히 나빠졌다. 현재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를 보려면 아이패드를 20~30㎝ 눈 앞으로 바짝 붙여야 할 정도다. 그 이상 멀어지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져 정확하게 보기 힘들다.


"배우는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면서 시력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제작은 연출 못지않게 큰 무대를 오밀조밀 살펴 봐야 된다.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되는데 아무래도 시력 때문에 어렵다."


송 대표는 그동안 출연한 수많은 작품 중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유리동물원’을 꼽았다. 유리동물원은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1911~1983)가 1944년에 발표한 희곡이다. 대공황(1929~1933년) 이후 미국 한 가족의 일상을 보여준다. 작품의 화자인 막내 톰은 작가를 꿈꾸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구두공장에서 일하는 청년이다. 톰은 계속 가족을 떠나고 싶어한다.


"톰 역할을 좋아해서 유리동물원을 세 번 했다. 젊을 때 다 반항기가 있지 않나. 집안에 대한 반항, 엄마에 대한 반항, 또 집을 떠나서 어디로 가고 싶은 그런 욕망. 그런 심리가 톰이라는 역할에 잘 투영돼 있다. 톰이 나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송 대표는 28살 때인 1985년 톰처럼 훌쩍 집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1983년 첫 해외 촬영이 계기가 됐다. 유럽에서 촬영을 마치고 뉴욕을 들렀다. "그때만 해도 뉴욕과 서울의 격차가 컸다. 와! 이게 뭐 다른 세상이었다. 지구에 이런 데가 있나 싶었다. 그때 뉴욕을 보고 인기고 돈이고 다 끝내고 여기 와서 몇 년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공교롭게도 뉴욕을 떠나기 직전 유리동물원을 공연하기도 했다. 송 대표는 3년 6개월가량 뉴욕에서 생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좋았던 것 같다. 그때 그렇게 용기를 내지 않았으면 평생 못 했을 것 같다. 3년 6개월 있다 보니까 이 정도 구경했으면 됐다 싶었다. 다시 연기하고 싶고 또 본 게 있으니까 (극을) 만들고도 싶었다."


뉴욕 생활은 송 대표가 공연 제작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주중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주말이면 하루 2~3편씩 공연을 봤다. "피터 슈만이라는 연출자가 만든 대사 한마디 없이 인형과 사람만으로 하는 공연이 있었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결국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 제작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알게 모르게 잠재의식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송승환 PMC프로덕션 대표가 1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송승환 PMC프로덕션 대표가 1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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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난타' 인기…올해 美·日·몽골 공연

난타는 장기 공연을 이어오다 코로나19 때문에 불가피하게 중단됐다. 지난해 11월 명동 난타 전용관에서 21개월 만에 공연을 재개했다. 송 대표는 명동이 생각보다 굉장히 잘 되고 있다고 했다. 지난 18일 난타 객석 점유율은 5시 공연이 76%, 8시 공연이 68%를 기록했다. 8시 공연의 경우 관객 228명 중 174명이 외국인이었다. 높은 외국인 관광객 비율은 난타가 장기 공연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다.


"객석의 70~80%를 외국인 관광객들이 채우니까 시장이 계속 있고 난타가 20년 넘게 장기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브로드웨이도 마찬가지다. 브로드웨이 공연을 뉴요커들만 보는 게 아니다. 미 전역에서, 전 세계에서 오는 관광객들이 객석을 채운다. 영국 웨스트엔드도 마찬가지다. 장기 공연을 위해서는 내국인만으로는 안 된다. 외국인 관광객이 객석의 50% 이상을 채워줘야 한다."


난타는 지난해 10월 브로드웨이에서 19년 만에 공연을 다시 했다. 2003년 9월 브로드웨이 초연을 했던 뉴 빅토리 극장의 초청을 받아 2주간 공연했다. 올해는 두 달 동안 미국 투어가 예정돼 있다. 미네아폴리스에서 6주, 노스캐롤라이나에서 2주 공연할 예정이다. 8월에는 몽골, 10월에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공연한다.


송 대표는 올해 하반기에는 난타의 해외 공연이 잇달아 있어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난타도 쥐덫처럼 롱런했으면 한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난타는 계속 됐으면 좋겠다."


카페에서 나와 다시 송 대표의 사무실까지 함께 걸었다. 돌아올 때는 송 대표가 좋아한다는 ‘대학로 뒷길’을 걸었다. "대학로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이 길은 항상 한적해서 좋다."


송 대표는 "내 인생을 돌아보면 아주 복잡한 도시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바쁘게 살아왔던 것 같다. 이제는 한적한 오솔길을 좀 천천히 걷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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