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취임 1주년을 맞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강점'으로는 아시아개발은행(ADB)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을 거치며 쌓은 경험과 능력이 단연 우선순위로 꼽힌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속에서 한은 역사상 최단기간, 최대폭의 기준금리 인상을 이끌면서 현재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위기를 방어했다는 평가다. 지난 3월에는 주요국 중 가장 먼저 금리를 동결해 '판단 미스'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곧바로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등 글로벌 금융불안이 확산하면서 이 총재의 결정이 결론적으로 옳았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한은 노동조합이 최근 직원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84%는 이 총재의 물가안정을 위한 노력이 시의적절하게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역대 한은 총재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개혁적인 소통 방식도 강점이다. 이 총재는 올해 초 기자들과의 신년 간담회에서 '올해도 소통을 강화할 것이냐'는 질문에 웃으며 "제 입을 막는 것보다, 여러분 귀를 막는 게 더 빠를 거 같다"고 말했다. 실제 이 총재는 그동안 직설적이고 쉬운 화법으로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지난 10월 '서학개미'들에게 해외투자의 위험을 경고하고, 7월에는 내 집 마련을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고금리 위험을 생각하라'고 조언해 '창용신'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이 총재는 한은의 통화정책 방향을 예고하는 '포워드 가이던스'를 처음 도입해 시장의 불확실성을 크게 낮췄다. 올해 1월부터는 최종금리에 대한 금융통화위원들의 생각도 모두 공개하고 있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혁신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다만 이 총재의 강점이 동전의 양면처럼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직설적인 화법이 가끔 시장의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으로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 총재가 갖는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에 최대한 시장 개입을 줄이고 무게감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측에서는 이 총재의 소통 행보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실제 지난해 10월에는 이 총재가 '점진적인 금리인상' 방침을 밝혀놓고는, 금통위에선 '빅스텝(기준금리 0.50%포인트 인상)'을 단행해 "말을 바꿨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이 총재는 '전제 조건이 변하면 통화정책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명했으나, 이 총재의 포워드 가이던스가 시장의 쏠림현상을 가중시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뛰어난 경제학자로 살아온 이 총재의 한은 내부경영 문제도 약점으로 거론된다. 한은 노조 설문조사에서 직원 46%는 이 총재의 내부경영에 대해 '못함', '매우 못함'으로 평가했다. 이 총재는 '한은사(寺)'라고 불릴 만큼 보수적인 한은의 조직문화를 바꾸기 위해 위계질서를 타파하는 데 집중하고 있으나, 정작 직원들 사이에선 "일만 늘고 보수와 복지는 그대로"라는 불만이 많다. 업무에 비해 낮은 급여와 처우를 개선해달라는 목소리가 크지만 이 총재 취임 이후에도 뚜렷한 변화가 없다 보니 젊은 직원들의 사기가 특히 저하되는 모습이다. 한은 관계자는 "설문조사 결과 발표 이후에도 이 총재 등 위에선 큰 반응이 없는 상황"이라며 "직원들은 급여에 대한 불만이 크다"고 토로했다.
한은 내부에서는 이 총재가 한은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이 총재가 세계적인 거시경제 석학들과 어깨를 견주며 토론을 하거나 주요 국제회의 등에 참여해 적극 목소리를 내면서 자연스레 한은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최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등에 참석한 후 IMF가 주최하는 고위급 토론 패널로 초청돼 올리비에 블랑샤르 매사추세츠공대(MIT) 명예교수, 모하메드 엘 에리언 등 '경제계 구루'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은 총재의 이 같은 고위급 패널 토론 참석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한은 총재 부임 전 IMF 아시아태평양 국장으로 8년 동안 재임하면서 쌓은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가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다. 화려한 인맥도 빠질 수 없는 이 총재의 자산이다. 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과 하버드대에서 인연을 맺은 그는 서머스의 애제자이며, 올리비에 전 IMF 수석이코노미스트,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등과도 두터운 친분을 과시하고 있다.
이 총재의 능력은 위기 시 빛을 발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출렁였을 때는 지체없이 원인을 분석하고 국내 금융시장 영향을 체크하는 데 주력했다. SVB 사태 직후 관련 부서 회의에 참석한 한은 직원은 "SVB사태로 불안감이 시장에 증폭되고 있을 때 총재가 직접 부서회의를 주도하고 일사불란하게 사태 파악을 위해 지휘하는 모습에 신뢰감이 커졌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10월14일 세계적인 킹달러로 원·달러 환율이 1442.5원까지 치솟았을 때 이 총재는 밤잠을 설쳐가며 글로벌 상황을 체크하고 원인 파악과 대응 마련에 나섰다. 별도의 태스크포스(TF)를 즉각 꾸리고 국민연금과 외환스와프를 체결하는 등 대처에 적극 나서면서 힘든 고비를 무난히 넘겼다. 지난해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가 터졌을 때는 초기 대응에 다소 늦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후 정부와 협의를 통해 적격담보증권을 확대하고 환매조건부증권(RP) 매입에 나서면서 위기를 봉합했다.
이 총재가 취임 때부터 정부와의 폴리시믹스(policy mix·정책 조합)를 유독 강조하다 보니 때로는 한은의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매주 일요일에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과 정례 회동을 하는데 이같은 잦은 만남은 물가·경기 등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자칫 정부의 압박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다. 지난 2월 한은이 기준금리 인상 행보를 멈추고 동결에 나섰지만 금융당국이 시중은행에 금리인하 압박을 가하면서 통화정책 무력화 논란이 불거졌는데 이 총재는 정부의 금리개입 필요성을 강조하며 비판을 일축했다. 이달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중앙은행과 금융당국의 시각차가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지만 이 총재는 이를 적극 부인하며 정부 손을 들었다.
일각에서는 "정책 조합도 중요하지만 중앙은행으로서 정부와의 적절한 긴장감이 필요하다"며 "내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올해 하반기 경기를 우려한 정부가 금리인하 시기를 앞당기려 할 수 있는데, 물가안정을 우선으로 할 중앙은행 수장으로서 소신을 갖고 통화정책을 운용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올해 하반기 이 총재의 리더십이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1년 전 취임사에서 한국 경제의 장기 저성장 늪을 우려,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에만 머물지 않고 재정정책과 구조개혁에 힘을 보태겠다며 중앙은행 역할 확대를 주문한 이 총재가 아직 본격적인 구조개혁의 목소리는 내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긴축 사이클의 끝이 보이는 만큼 이제는 그간 중립적 입장을 고수했던 한은이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로서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해 목소리를 키워야 할 과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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