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류 상태입니다."
한 대형 자산운용사 리츠사업 담당 임원은 지난해부터 모그룹과 진행해온 리츠 상장을 통한 자산유동화 프로젝트를 잠정 보류했다. 금융 불안에 국내 리츠시장이 얼어붙고,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 여파로 상업용 부동산 위기설이 나오는 등 시장 상황이 나빠져서다. 2021년 SK리츠의 성공적 상장 이후 대기업 사이에서 리츠 활용 방안 논의가 활발했지만 최근엔 분위기가 다소 침체됐다. 부동산 가격이 낮아진 지금이 외려 투자 적기라는 시각도 있지만, 대기업 리츠는 특히나 금리·경기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보인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국내 리츠시장은 2019년 롯데리츠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대별할 수 있다. 첫 대기업 스폰서 리츠인 롯데리츠의 등장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대기업 스폰서 리츠란 삼성·SK·롯데·한화 등 대기업이 리츠의 핵심 투자자 또는 최대주주로 보유 부동산을 리츠에 이전하고 자본을 투자한 리츠를 말한다.
국내 시장에서 롯데리츠 등장 이전에 상장된 리츠는 5개에 불과했다. 이들의 합산 자산 규모는 1조8000억원. 그러던 2019년 10월 롯데리츠가 등장하면서 리츠시장은 급격히 커졌다. 롯데리츠의 자산 규모는 2019년 말 기준 1조6000억원으로 기존 상장리츠를 모두 합친 것과 비슷했다. 대어급이 들어오면서 시장 규모가 달라졌다. 지난해 말 기준 상장리츠 수는 21개, 자산 규모는 13조3000억원으로 커졌다. 대기업 스폰서 리츠로는 재작년 SK리츠에 이어 올 들어서는 한화리츠·삼성FN리츠까지 코스피에 상장했다.
다만 롯데리츠는 명암이 뚜렷하다. 국내 리츠시장의 파이를 키운 상징성을 지녔지만 가격은 참담한 수준이다. 롯데마트·롯데백화점·롯데아웃렛 등 15개의 빌딩을 담은 롯데리츠의 현재 주당 가격은 3670원. 공모가(5000원) 대비 25% 넘게 하락했다. 2019년 10월 주당 5000원의 공모가로 상장한 롯데리츠는 상장 첫해에는 6000원대 주가를 유지했다. 이후 주가는 5000원 선, 4000원 선이 차례로 무너지면서 현재 3000원대로 추락했다.
롯데라는 대기업 스폰서를 믿은 투자자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롯데쇼핑이 전체 지분의 50%를 보유하고 있으며 수도권과 광역시 등 주요 지역에 위치한 롯데백화점·롯데마트·롯데아울렛 등 15개 대기업 계열 부동산을 자산으로 담은 리츠 가격이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롯데리츠는 어쩌다 이런 수모를 겪게 됐을까.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온라인 전자상거래에 밀려 유통 매장의 가치가 떨어진 영향이 컸다. 여기에 관광객 급감과 고금리 상황도 롯데그룹에 직격탄이 됐다. 롯데그룹이 보유한 백화점·대형마트·아울렛 등의 자산가치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저금리로 대출을 받아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레버리지 효과가 사라지며 부동산 투자 매력도 역시 하락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지난해 10월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디폴트로 국내 부동산시장 상황도 악화했다.
롯데리츠는 지난해 하반기 리파이낸싱(자금 재조달)을 진행했는데, 당시 급격히 상승한 금리 탓에 이자비용이 크게 증가했다. 롯데리츠가 공시한 내용을 보면 올 1분기 단기사채 2000억원, 장기차입금 4580억을 재조달했다. 올 상반기 금융비용은 전년 동기 대비 39% 늘어난 285억원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올해 주당배당금(DPS)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2년을 보면 올해 하반기 3600억원, 내년 상반기 2050억원, 내년 하반기 2850억원의 리파이낸싱이 예정돼 있다. 최근 금리 수준에 비춰볼 때 롤오버(만기대출연장) 금리는 4~5%대로 예측된다. 지난해 말 기준 총 차입금 및 사채 규모는 1조1000억원으로, 리파이낸싱 대상 금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75% 수준이다. 리파이낸싱 리스크가 큰 상황이다.
이은상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롯데리츠는 2023년~2024년 단기로 조달한 차입금과 사채를 리파이낸싱하면서 금융 비용 부담이 점차 개선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과거 수준까지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라며 "과거 저금리 환경에서 고정금리로 차입 기간을 길게 가져갔던 반면 최근에는 변동금리로 차입 기간을 짧게 가져가면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금융비용이 급격히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고금리 리스크는 롯데리츠만의 고민거리는 아니다. 현재 상장된 SK리츠·삼성FN리츠·한화리츠 등도 피해갈 수 없는 대목이다. 지난해 상반기 7000원을 넘어섰던 SK리츠 가격도 현재 공모가 아래로 내려갔다. 종로구 SK서린빌딩과 SK종로타워, 분당 SK유타워 등 오피스 3개동과 주유소 116개를 보유 중인 SK리츠는 조달금리 상승에 따른 이자비용 부담과 유상증자로 인한 지분가치 희석 우려를 안고 있다. 더구나 올 하반기 4608억원, 내년 하반기 1조원 규모의 리파이낸싱도 예정돼 있다. 롤오버 금리는 2.9~3.8% 수준으로 예상된다. 올해는 종로타워 편입 목적의 전환단기사채 상환을 위해 1240억원의 규모의 유상증자도 예정돼 있다. 올해 주당배당금은 전년보다 소폭 감소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은 탓에 이달 상장한 삼성그룹 첫 공모 상장 리츠인 삼성FN리츠도 상장 첫날 공모가(5000원)를 밑돌았다. 지난달 상장한 한화리츠도 상장 당일 시초가 대비 7.96%가량 하락한 가격(4510원)에 거래를 마치며 체면을 구겼다. 삼성FN리츠와 한화리츠는 현재 공모가를 겨우 넘어섰다.
시장 전문가들은 대기업 스폰서 리츠는 상품으로 근원적인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투자처로서의 역할보다는 모회사의 사업 논리와 계열사 자금 확보 목적에 따를 수 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상장된 한화리츠와 삼성FN리츠는 모두 계열 보험회사와 관련이 있다. 한화리츠를 보면 한화그룹의 금융계열사인 한화생명·한화손해보험이 보유 부동산을 리츠에 넘기고, 다시 리츠에 재투자해 최대주주에 올라 있는 구조다. 삼성FN리츠 역시 삼성그룹 금융계열사 삼성생명·삼성화재가 최대주주고, 보유 부동산을 리츠로 넘겼다. 보험사 입장에선 보유 자산을 리츠에 넘기면 현금을 확보하면서, 직접 보유한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부동산을 통제할 수 있다. 건물주가 임대료를 터무니없이 올리거나 갑자기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 등도 피할 수 있다. 현물출자 때 법인세 과세이연 혜택도 누릴 수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어떨까. 리츠 사업이 개별적으로 운영되기보다는 모기업의 사업 방향성에 맞출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시장논리에 따른 수익 극대화는 쉽지 않다. 일반 리츠의 경우 임대료를 올리거나, 자산가치 상승 때 매각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다수의 계열사가 입주한 빌딩을 두고 대기업 스폰서 리츠가 이런 식으로 결정하기는 어렵다. 안정적인 운용의 장점은 있지만, 일반 리츠처럼 시장에서 자산을 매입하고 운용하고 청산하는 과정이 시장논리보다는 모회사의 사업 운용과 자금 확보 상황에 따라 달라질 확률이 높다. 리츠 업계 고위 관계자는 "계열사가 입주해 있다고 하면 임대료를 높일 때 이해상충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라며 "또 계열사가 입주한 부동산인데 자유롭게 시장가격에 매각해서 리츠 수익률을 높일 수 있나라는 질문을 해보면 아마 결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 확산으로 사무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줄면서 공실률이 증가하고 빌딩 가치는 떨어졌다는 점도 대기업 스폰서 리츠 투자를 권하기 힘든 요인이다. 김필규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 선임연구위원은 "대기업 스폰서 리츠는 안정적인 배당상품으로 분명 매력적이지만, 부동산 가격 하락에 따른 리스크는 분명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부동산 가격을 예단할 수 없지만 오피스빌딩 가치가 하락하는 시점에서 대기업들이 리츠에 빌딩을 비싸게 던진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것은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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