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룸은 설레임을 불러일으킨다. 형형색색, 각양각색 옷들을 보노라면 생각이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평화로워진다. 창작이 주는 자유로움 때문일까. 옷을 입은 모습을 상상한다. 지난 4월 12일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카루소의 쇼룸을 찾았을 때 느낌이다.
문을 두드리니 위층에서 누가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60대라고는 믿기 힘든 동안(童顔)의 작은 남자, 한국의 대표적인 디자이너인 장광효 패션디자이너가 나타났다. "그동안 잘 지냈죠?" 그의 부드러운 첫마디에 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파리컬렉션에 진출한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복 디자이너인 그의 성장스토리에서 대학 시절 경험담, 패션에 입문한 과정과 철학, 정책적인 제언까지 듣다보니 순식간에 2시간이 흘렀다.
최근 외국에 출장을 다녀왔다고 들었다.
봄, 가을에 간다. 가서 시장 동향도 살피고 머리도 식히고 온다. 이번에는 밀라노와 파리에 갔다 왔다.
해외 패션의 흐름은 어떤가?
패션 선진국이라고 하는 이탈리아나 프랑스는 경기가 썩 좋지 않다. 코로나 영향도 있고, 그쪽 라이프스타일도 우리하고는 조금 틀리다. 그쪽은 멋 부리고 명품을 사 입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중들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최고 시장이다. K팝이나 무비, 음식, 패션까지 세계에서 가장 관심을 많이 받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유럽 사람들에게 제일 가보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모두 서울이라고 하더라. 대단하다.
놀라운 변화다.
10년 전만 해도 '언제 기회 되면 한번 가봐야지'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열이면 열명이 다 '세계에서 제일 가고 싶은 나라가 너네 나라야, 한국이야, 서울이야' 그런다. 사실 이런 좋은 기회가 그렇게 흔치 않다. 길게 갈 것 같지도 않을 것 같고. 지금 우리나라는 진짜 선진국이 되기 위한 기로에 놓여 있다. 경제 지표로 보면 선진국이지만 알맹이로 보면 우리는 성숙 단계로 가는 갈림길에 있다.
요즘 젊은이들 보면 많이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메시지를 줘야 할까 고민한다. 지난 40년 간 한 해도 쉬지 않고 컬렉션을 1년에 두 번씩 했다. 후배들을 위해서 이 자리를 계속 이어가줘야 한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K패션의 위치는 어느 정도라고 보나.
만약 내가 30~40대라면 청담동에 안 있고 파리나 어디로 가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상품을 전 세계 시장에 뿌릴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명품을 좋아하는데 그 책임은 나한테도 있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 숫자로 보면 우리나라가 아마 세계 1등일 것이다. 패션 학교도 학원까지 합하면 약 250군데로 우리나라가 제일 많다. 프랑스만 해도 10개가 안 되고 파리 시내에는 대여섯 개 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서울만 해도 한 100군데가 넘는다. 그런데 왜 세계를 리드하지 못하고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안 나오나 싶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세계를 리드하는 흐름이 요즘 무르익어 가는 것 아닌가?
대한민국에 들어온 외국 브랜드가 한 400~500개 된다. 진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만을 따져도 한 30~40개 된다. 웬만한 브랜드는 다 들어와 있다. 그들이 왜 들어왔겠나. 그만큼 시장과 소비자가 있고 판매가 되고 매출이 오르니까 그런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외국에서 그렇지 못하다. 몇몇 디자이너가 열심히 하는데 독자적인 브랜드를 가지고 외국에 매장을 낸 회사는 아직 없다. 편집 매장에서 팔리는 정도다.
그럼 K팝이나 영화와 달리 한국이 세계 패션계에서 주목 받고 있다고 보기에는 빠른가?
아직은 빠른 것 같다. K팝도 그냥 가만히 있는데 된 건 아니다. BTS가 꽃을 피웠지만 그전에 이미 아이돌그룹이나 걸그룹들이 가서 도전해 상위권에 올랐다가 컴백하고 그랬다. 패션은 장벽이 너무 높다. 나 같은 사람이 파리나 이탈리아에 가서 주문을 받으려고 한다면 세계 최고의 원단이나 봉제, 디자인을 갖추고 세계 최고급 홍보를 해야 가능할 것이다.
패키지로 같이 움직여야 되는데 우리는 인프라가 약하다는 얘기 같다.
영화 같은 경우 수백억, 수천억씩 투자를 하지 않나. 그런데 패션은 개인이 한다. 돈 없는 개인 디자이너가 아이디어 하나 갖고 세계적인 명품과 싸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이디어는 된다. 그러나 아이디어는 허상이고 그걸 실물로 보여줘야 한다. 그런데 구현할 수 있는 인프라나 자본력, 이런 것들이 미흡하다. 디자인을 할 수는 있지만 그걸 실제 명품으로 만들 수 있는 체계와 지원, 이런 것들이 안돼 있다.
우리나라 젊은 디자이너들은 아이디어가 있고 할 수 있는 잠재력, 능력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마음만 갖고 되는 것은 아니고 환타지가 들어가야 되는데 그게 돈 아니면 어떻게 되겠나. 그래서 내가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 패션쇼를 하는 것이다. 내가 후배들이 밟고 일어서는 디딤돌이 됐으면 좋겠다.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우리 패션도 많이 발전한 것 아닌가?
국내에서 예를 들어 연매출을150억원 정도 하는데 해외에 수출해 10억~15억원을 버는 것을 가지고 세계 선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쉬운 점이 있다. 우선 나라에서 지원을 해줘서 해외 쇼에 디자이너를 보내는데 경험 없는 신인들을 보낸다. 나가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걸음마 하는 아이에게 100m 달리기를 시키면 되겠나. 지원 또한 일회성이다. 지속성이 없다보니 허파에 바람만 들어가 오래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세금만 낭비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경험 있는, 현실화 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해서 최소 5년 정도 지속적으로 지원하면 뭐라도 된다.
우리나라 패션 시장이 글로벌로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리나라 토종 브랜드 중에는 명품 반열에 들어가는게 없다. 하지만 우리가 명품을 좋아하고 이용하고 퀄리티를 알기에 그만큼 좋은 옷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비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 시스템만 좀 갖춰지면 된다고 나는 본다. K팝이 세계 시장 선두를 달리는데 그건 플랫폼을 잘 갖춰가지고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아무것도 없이 그냥 갑자기 된 게 아니다.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외국으로 진출해서 일하다 보면 우리가 세계 시장을 잡을 기회가 오지 않을까.
외국에서 혹시 한국 디자이너를 소개해달라는 요청 같은 건 없었나?
한 건 있었다. 그리고 내 브랜드를 이탈리아 브랜드가 사고 싶다고 프러포즈를 해왔다. 올 초 일인데 가격만 맞으면 판다고 했다. 왜냐하면 내 브랜드가 유럽 시장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꼭 돈을 벌고 판다는 개념보다는 국내 디자이너를, 그만큼 우리 브랜드를 인정해 준다는 뜻이어서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웬만한 남자 연예인들은 다 '장광효 옷'을 입은 것으로 안다.
조용필 서태지 소방차 안성기 박중훈 황정민 비 정우성 이병헌 현빈 금난새….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배우 이정재씨와 가수 임영웅씨도 입었다. 최근에는 MBN '불타는 트롯맨' 출연자들 의상을 도맡아 입혔다. 각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자기 일이 있다.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그런 의욕과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해야 되지 않을까. 적당히 하면 최고가 못 된다. 현대가, 롯데가, 애경유지 등 재벌 2,3세들도 많다.
패션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궁금하다.
중학생 때 영화 <닥터 지바고>를 봤는데 거기 나온 의상이 너무 멋있었다. 심장이 뛸 정도로 내게 강한 충격을 줬다. '패션'이 처음 내게 박힌 게 그때다.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에 들어갔는데 당시 조형대 학장이 건축가로 유명한 김수근 선생이었다. 거기서 부전공으로 패션을 공부했다. 당시 패션전공생들 사이에 1년에 한두 명씩은 사법고시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아버지도 내가 사법고시를 하기를 원했다. 당시 교수님이 네 꿈이 뭐냐고 해서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먹는 것 노는 것을 지금부터 최고로 하라며 백화점, 호텔, 이태원 술집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그때부터 패션 감각을 키웠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일제강점기 때 공부를 좀 했다. 그런데 세상과 맞지 않으니 초야에서 책 보고 음악 들으며 살았다. 양조장을 해 집안이 먹고 사는 데 문제는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사법고시 공부를 하거나 군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나는 아버지가 원하는 데로 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바라는 삶이 아니라 내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패션을 전공하겠다고 생각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미술을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감각이 좀 있었다. 또 남이 다 해놓은 길을 가는 것보다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정식으로 코스를 밟은 디자이너 가운데 남자 패션디자이너는 내가 1호다. 당시만 해도 남성복 디자이너는 없었다. 프랑스 유학도 갔다오고 캠브리지멤버스, 논노 등에서 근무하다가 내 사업을 해야겠다 싶어서 1987년 카루소를 창업했다. 37년 됐는데 돈도 벌고 사기도 당했지만 이제 죽을 때까지 쇼를 할 수 있을만큼은 여유가 된다. 내 모토는 좋은 사람이 되자, 내 분야의 최고가 되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이다.
역사나 건축 등과 패션을 접목하는 등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시도를 해왔다.
역사에 관심이 많다. 매월당 김시습과 패션을 접목하고, 열하일기와 패션을 접목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뉴프론티어 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남이 안 하는 것을 하는 걸 좋아한다. 모든 사람이 이 사람 나쁘다고 하면 나는 '왜 나빠? 내가 보기엔 좋은 면도 있는데?'라고 생각한다.
나는 쇼할 때 남자들에게 치마도 입힌다. 왜 치마를 여자만 입어야 하나? 옛날에 여성은 원래 바지를 안 입었다. 샤넬이 최초로 바지를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치마가 어떻게 보면 편할 수 있다. 요즘은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도 하는 세상인데 굳이 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나? 사고의 전환이라는 게 창조적인 것도 있다. 도전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도덕이나 윤리를 확 바꿔서 새로운 환타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1%도 없다. 전통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걸 가능하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변화는 필요하다.
옷을 디자인 할 때 주목하는 포인트가 있다면 무엇인가?
키 1m 85cm가 되고, 얼굴이 작고, 허리도 잘룩하고, 근육도 적당해 몸매 비율이 완벽하다면 내가 그 사람한테 맞춘다. 그런데 얼굴이 크다든가, 배가 나왔다든가, 아니면 말라깽이라든가, 대부분은 다 하자가 있다. 완벽한 사람은 드물다. 상대가 뭔가 부족하면 내 기준에 맞추라고 한다. 다리가 짧은 사람은 좀 길게 보이게 하고, 다리가 긴 사람은 좀 짧게 보이게 하고 마른 사람은 좀 뚱뚱하게 보이게 하는 게 가능하다. 옷 사이즈를 어떻게 하고 패턴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조정할 수 있다.
옷을 입는 사람에게 말한다. '처음에 입을 때는 혼란이 와서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번 적응해봐라. 그래서 한두 달 입어보면, 이해하면 당신 옷이 되는 것이다. 옷은 100% 내 책임이 아니다. 당신한테 50% 책임이 있고, 50%는 나한테 있다. 스스로 멋을 찾아라. 내가 발뺌하려는 게 아니라 해준 사람의 역량도 있지만 입는 사람도 몸매 관리라든가 그날 그날 컨디션 조절도 해야 한다. 나도 최선을 다할테니 당신도 같이 노력 하자.'
상대가 그걸 어느 정도 받아들이나? 이해를 하나?
이해 안 하면, 안 하면 된다. 나는 옷 장사가 아니다.
패션을 무어라고 규정하나. 패션에 대한 철학은?
패션은 환타지다, 맛있다, 매력이 있다. 그리고 꿈이다. 패션을 모르면 불행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 것 몰라, 그냥 편하게 살래'라고 말한다면 나는 '너는 왜 사니?'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하루를 축제처럼 살 수 있는데 왜 구질구질하게 사는가. 우리는 나이 먹으면 다 죽는다. 멋도 80세 전에 부리는 것이다. 그 이후는 관절이 안좋아 멋 부리기 힘들다. 사람의 매력이라는 게 꼭 잘생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 않나. 기분이 좋으면 뭐라도 더 잘 되지 않나. 하루하루가 칙칙하지 않고 다 축제다. 자기 자신이 그렇게 살아도 얼마 안 있으면 늙고 병들고 죽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가 진짜 소중할 것 같다.
하루하루를 축제처럼 살아서인지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인다.
우리 나이로 올해 68세다. 내 집은 가구, 조명 등이 다 세팅이 돼있다. 휴양지의 좋은 호텔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게 꾸몄다. 그래야 잘 때 좋다. 누우면 5분 안에 잠든다. 잘 자는 게 건강의 기본인 것 같다. 적당히 소식하고, 과일 많이 먹고, 술 담배 안 하고, 잘 자서 건강한 것 아닐까.
그리고 고민을 안 한다. 고민하기 싫다. 고민을 안 해도, 될 일은 다 되더라. 고민한다고 안 될 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한다. 그러니까 크게 꿈도 없다. 그런데 사실은 알고보면 그게 큰 꿈이다. 쓸데 없는 꿈을 버린다는 것도 굉장히 큰 꿈이다. 천국이 따로 없다. 내 마음이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아내와 화목하게 지낸다. 저녁은 꼭 아내와 먹고 외부 점심 약속은 간단하게 먹는다.
패션디자이너의 삶은 바쁘고 화려할 것 같은데 정제된 삶을 사는 것 같다
낮에 충분히 일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밤에 하는가. 밤에는 집에서 쉬어야지. 나는 6개월 후 것을 미리 준비한다. 봄, 가을에 주최하는 쇼에 내 철학과 꿈과 희망,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다 쏟아넣는다. 올 3월 16일에 한 쇼의 옷을 지난해 12월 24일까지 다 만들었다. 그때부터 코디 스타일링 하며 수정, 보완하고 모델들 불러다 입혀보는 일 등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어려운 상황에서 쇼를 한다. 유럽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완벽하게 옷을 만들어야 한다.
많은 게 미비하지만 일단 화면으로 봤을 때 손색이 없게 해야 한다. 나는 3개월 동안 완벽하게 그걸 한다. 그렇게 해야 내가 원하는 대로 될 뿐더러 유럽 사람들, 선진국 사람들이 봤을 때 이 디자이너는 수준이 우리하고 별 차이가 없네 하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 대충 하면 옷이 대충 된다. 나는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 후배들한테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내가 존재 가치가 있고 최선을 다하고 또 필요한 사람이 될 것 아닌가.
앞으로 꿈이 있다면?
패션박물관을 세우는 것이다. 땅을 구입해 놨다. 한 3년 있다가 시작할 계획이다. 재단 같은 것을 설립해 사회에 기증할 생각이다. 후학들을 위해 오래오래 영속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장광효는 누구인가]
1956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국민대학교 산업미술과를 나왔다. 홍익대에서 직물디자인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퐁텐블로 예술학교에서 유학했다. 패션회사에 다니다가 1987년 카루소를 런칭해 1994년 남성복 디자이너 최초로 파리컬렉션에 진출했다. MBC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와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하는 등 대중에게 친숙한 패션디자이너다. 창작 활동 외에 군복과 경찰복을 비롯해 신세계, 농협, SK텔레콤 등 수많은 기관과 기업의 유니폼을 디자인했다. 소프라노 길애령 목포대 교수가 부인이다. 지은 책으로는 <세상에 감성을 입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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