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단독 에세이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로 단박에 유명인사가 된 번역가 심혜경. 그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누구라도 세월을 한참 빗겨 간 그의 외모 때문에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다. 특히 할머니라는 호칭이 주는 통념적 이미지를 머릿속에 담아둔 사람이라면 더욱이. 65세의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젊고 생기있는 얼굴의 그는 눈빛마저 섬에서 서울 구경 온 소녀처럼 반짝인다.
“사람들이 예의상 그런 건지는 몰라도 자꾸 피부 비결을 물어요(웃음). 저는 정말로 스킨, 로션도 사용하지 않고 선크림만 바르거든요. 처음엔 화장하고 꾸미는 시간이 아깝고 귀찮아서 그런 건데 그게 아무 문제가 없다 보니 쭉 이어진 거죠. 만약 제게 굳이 비결이 있다면 그건 바로 배우기를 즐기는 거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책을 읽고 또 읽으며 호기심을 채울 수 있었다는 거죠.”
심혜경 작가는 대학 졸업 후 27년 동안을 줄곧 정독도서관과 남산도서관 등 서울시 공공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다. 천성적으로 스테레오 타입을 싫어하는 그가 끝까지 성실하게 출퇴근하며 견딜 수 있었던 건 수십만 권의 책으로 둘러싸인 도서관이라는 공간 때문이었다. 그는 퇴근할 때마다 책을 대출해서 밤새 탐독하고 다음 날 출근하면서 반납하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했다.
도서 대출 기록상 어느 해에는 500권(읽다가 포기한 책들도 포함)을 읽은 적도 있었으니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 간 책은 족히 2만 권이 넘는다. 그는 “시쳇말로 정말 물 쓰듯이 책을 볼 수 있었다”며 “저의 유년기는 책이 정말로 귀한 시절이었다”고 강조한다.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책을 읽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일까.
“프랑스 작가 피에르 바야르를 좋아해요.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 시리즈 13권중에 제 1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유명하죠. 사실 그 책의 요지는 ‘책을 많이 읽다 보면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한 시간은 너끈히 얘기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결코 안 읽었는데 읽은 척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책을 많이 읽어 내공이 쌓이면 책 제목과 작가만 보고도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 제목에 낚여서 책을 샀다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고요. (웃음)”
그는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3대가 모여 사는 집에 아버지가 맏아들인 터라 대학생 삼촌들이 있었는데 그 덕에 초등학교 때 벌써 대학 교양 국어책까지 섭렵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집에 책이 많다는 친구를 수소문해 가까워진 다음에는 책 동냥을 다니기도 했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어 책에 집착(?)했던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면 책벌레가 책을 많이 읽고 공덕을 쌓아 인간으로 태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시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중략)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_(피천득 역)”
심 작가는 청소년기에 이 시를 읽고 인생에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그래서 젊은 시절 내내 어떤 순간의 결단이 엄청나게 중요하며 한 번 선택한 것은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50대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그것 또한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선택이 명료해지고 간결해졌다”며 “지나고 나서 보면 별일 아닌 것도 많고. 힘들거나 잘못됐다고 생각될 때는 빨리 포기하는 것도 좋은 선택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이 그런 거죠. 내 말에 무게가 실리는 것. 물론 내가 은퇴하고 소일거리 나하고 지냈으면 주변에서 관심을 두지 않았을 테죠. 계속 책을 읽고 공부하다 보니 사람들이 제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는 15년 전, 50세가 되던 어느 날. 자신이 여전히 건강하고 에너지가 넘친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그러면서 앞으로 남은 긴 삶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그는 도서관에서 새롭게 독서지도 프로그램 업무를 맡게 되자 먼저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에 가서 상담교육을 전공했다. 독서지도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상담심리를 알아야 하지 않나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석사 학위를 받고 전문상담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때부터 공부하는 삶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심 작가는 원서를 직접 읽고 싶은 마음에 유명 문화센터 번역강좌를 등록했다. 그 후 본격적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편입해 영어영문학, 중어중문학, 일본학, 프랑스언어문화학을 전공했다. 그렇게 그가 지금까지 번역한 영어, 중국어, 일본어책이 20여 권에 달한다.
“번역의 매력은 원천(source)에 여러 양념(sauce)을 더하고 손질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할까요. 무엇보다 언어에 천착하는 게 재미가 있어요. 단어에 대한 통찰이 사물을 제대로 보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삶에서도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품성을 알게 되죠.”
그는 2016년 은퇴를 하고 서촌으로 이사를 했다. 정년인 만 60세를 1년 반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심 작가는 ‘일이 재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1년 반이라도 일찍 나가면 나보다 일 잘하는 젊은 사람을 채용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공공을 위한 일이 곧 나를 위한 길”이라며 “이것 역시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시선이 트인 것”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물론 빨리 은퇴해서 읽고 싶은 책 실컷 읽고, 하고 싶은 공부 실컷 하려는 욕심도 있었다. 스스로가 주는 자기 자신을 위한 선물이었던 셈이다.
서촌에서 그는 가까운 카페에 나가 늘 다른 사람들을 만나 책을 읽는다. 그는 “매일 읽는 것 자체가 엄청난 두뇌 운동”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좀 어려운 책은 혼자서 읽으면 잘 안 읽게 되는 법. 특히 원서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외국어는 전공을 해도 읽고 쓰지 않으면 다 잊어버리기 마련인지라. 처음엔 공부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원서 읽는 모임을 만들었다. 친화력이 좋아서 사람을 잘 포섭하는 그는 현재 일주일 단위로 만나는 독서모임을 10개나 하고 있다.
저녁에 만나는 모임은 일명 ‘벽돌 책 깨기’라고 두꺼운 책을 독파하는 모임이고 오전이나 점심에 만나는 모임은 주로 외국어 원서를 읽는다. 심 작가는 “터무니없이 많은 것처럼 들리지만 만나서 차 마시며 근황 토크 5분 정도 하고 바로 책을 읽는다”며 “단지 읽을 책만 들고 나가면 된다”고 강조한다. 모임의 지속비결은 간단하다. 토론하고 발제하는 그런 심각한 독서모임은 하지 않는 것. 귀찮고 힘들면 지속할 수 없으니까.
심 작가는 “좋아하는 작품은 원서를 모르는 단어가 한 개도 안 나올 때까지 읽고 싶다”고 말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일곱 번 읽었는데 아직도 모르는 단어가 있다며 의지를 다진다. 그가 좋아하는 문장은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으나 패배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에는 그 노인이 명백하게 패배한 것처럼 보이거든요. 살점이 하나도 없는, 뼈만 남은 청새치를 끌고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바다와의 대결에서 이 노인은 패배한 게 아니에요. 그는 바다에 진 게 아니거든요. 스포츠 게임처럼 명백하게 승패가 결정되는 일이 아니면 인생에서 패배는 없어요. 만약 내가 어떤 일에 실패하거나 중도하차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은 게 있었다면 나는 패배한 게 아닌 거죠. 헤밍웨이가 그걸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그는 현재 중국어책을 번역 중이다. 그간 번역하지 못했던 프랑스어책도 이젠 동화책 정도는 가능할 것 같고. 새로운 에세이도 집필 예정이다. 또 방송통신대학교에 독일어과가 없어서 전공을 못 했는데 올해에는 남산에 있는 주한독일문화원에 가서 독일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다.
“앞으로도 10년은 더 재밌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때로는 나 자신도 궁금해요. 이 열정이 언제까지 갈지. 아직도 마음은 30대 같거든요.”
공부가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그리고 인생에서 늦은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심작가는 활활 타오르는 에너지로 세상에 내비치고 있다. 그의 지적 호기심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그칠 줄을 모른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비트겐슈타인 책을 윤독으로 읽고 싶어요. 눈으로 읽고 귀로 들으면 두 배 이상의 효과가 있거든요. 저랑 같이 책 읽는 모임 하지 않을래요?”
추명희 작가
▶심혜경 작가는
1958년생.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정독도서관과 남산도서관 등 서울시 공공도서관 사서로 27년간 일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편입해 영어영문학, 중어중문학, 일본학, 프랑스언어문화학을 전공했으며 13년 동안 2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저서로는 ‘독학자의 서재(공저)’, ‘언니들의 여행법(공저)’,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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