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권해영 기자] 신흥국 국채 시장에 연초부터 온기가 돌고 있다. 미국, 유럽의 인플레이션이 정점을 찍었다는 시그널이 나오고, 중국의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으로 경기 반등에 대한 기대감이 확산되자 투자자들이 신흥국 국채 시장에 몰렸다. 하지만 투기 등급에 가까운 국채 발행이 이뤄지고 있고,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도 큰 만큼 이들의 베팅에 회의적인 시각도 제기된다.
18일 금융정보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헝가리, 루마니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멕시코 등 신흥국 14개국은 올해 들어 이달 초부터 12일까지 410억달러(약 51조원) 규모의 국채를 발행했다. 지난해 1월 전체 발행량(240억달러)을 크게 웃도는 규모다. 1월 기준 월간 발행액이 가장 많았던 2021년 1월(487억달러) 한 달 간 발행액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연간 90%에 가까운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지난해 7월 피치 기준 국가신용등급이 'B+'에서 'B'로 강등된 튀르키예(터키)조차도 국채 발행에 성공했다. 튀르키예 국채 신용등급은 '투기등급'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난 12일 금리 9.75%에 27억5000만달러 규모의 유로화 표시 채권을 발행했다. 메르베이유 파자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스트래티지스트는 "현금을 투자하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는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며 "루마니아, 헝가리 같은 곳은 굉장히 매력적인 프리미엄을 붙인 달러 표시 채권을 발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얼어붙었던 채권 시장에 차츰 온기가 돌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흐름이다. 미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은 지난해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해 고강도 긴축 기조에 나서자, 채권 가격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글로벌 채권 시장에서 투자자들은 보유 채권을 매도하며 긴축에 대응해왔다. 주요 외신은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력이 완화되고 중국 역시 반등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자 (신흥국들이) 기록적으로 빠른 속도로 차입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신흥국 국채 수요가 크게 늘어난 배경으로는 글로벌 인플레이션 정점 시그널이 꼽힌다. 미국의 지난해 12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6.5%로 1년 2개월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왔다. 물가 상승세가 둔화되면서 미국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 속도조절에 더욱 힘을 가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시장에선 Fed가 다음달 '베이비스텝(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는 데 베팅하고 있다.
아울러 개발도상국의 주요 성장 엔진인 중국이 도시 봉쇄 등 고강도 방역 정책인 '제로 코로나' 정책을 폐기하면서 글로벌 경기에 대한 낙관론도 제기된다. 미국, 유럽의 경기 침체를 중국이 성장률 반등을 통해 상쇄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진 것이다. 경기 바로미터로 '닥터 코퍼'라 불리는 구리부터 철광석, 알루미늄, 아연 등 원자재값은 중국의 방역정책 전환 후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다. 우다이 파트나이크 리걸앤제너럴 투자운용의 신흥국 채권 헤드는 최근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 폐기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며 "선진국은 올해 경기침체가 예상되는 반면 대형 신흥국 중에선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불황에 빠질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가 없다"고 최근 신흥국 국채 매수세의 배경을 설명했다.
다만 글로벌 경기침체가 불어닥치면 신흥 개도국이 더 취약한 만큼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시각도 있다. 크리스티안 마지오 TD증권 포트폴리오 전략 헤드는 "최근 신흥 시장의 차입 움직임은 지나치게 빠르다"며 "올해 몇몇 주요 경제에서 침체가 발생할 것이란 우리의 예상이 맞다면 시장 상황이 반드시 순조롭게 유지되진 않을 것"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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