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골프에서 홀인원은 행운과 기적의 상징어다. 한 번의 티샷으로 골프공이 홀컵에 빨려 들어가는 장면. 골퍼들이 필드 라운딩에서 평생 한 번 경험할까 말까 한 일이다.
그런 일을 경험하면 홀인원 기념패 제작은 기본이다. 라운딩 동료와 캐디에게 선물도 안겨야 한다. 수백만 원 비용 부담이 뒤따르는 이벤트다.
오죽하면 홀인원 보험까지 들며 언제 일어날지 모를 그날을 대비하겠는가. 홀인원은 분명 드문 일이다. 하지만 본인이 경험했거나, 동료의 홀인원을 목격했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장면인 셈이다.
바둑에서도 골프의 홀인원처럼 귀한 대접을 받는 존재가 있다. 바로 무승부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바둑의 세계에 무승부가 존재할까. 바둑은 엄밀히 말하면 무승부가 가능하지 않은 구조다. 흑을 쥔 쪽에서 덤을 얻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다섯 집 반, 요즘은 여섯 집 반이 기본이다.
쉽게 말해 흑을 쥔 쪽의 집이 백과 같으면 당연히 백의 승리다. 흑이 6집 더 많은 집을 차지해도 6집 반의 덤을 얻은 백이 승리한다. 흑과 백의 집을 세고 덤을 더하면 결국 승패는 갈린다. 가장 박빙은 0.5집(반집) 승부인데, 패한 쪽에서는 아쉽겠지만 반집을 진다고 해도 패배다.
그런 바둑에서 무승부가 나올 수 있다니 어떤 장면일까. 우선 바둑의 부분 전투 과정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장면이 나올 수 있다. 바둑에서는 이를 ‘빅’이라고 일컫는다. 빅은 흑이나 백, 어느 쪽이 먼저 단수를 치면 행동에 나선 쪽의 돌이 죽어버리는 모양이다.
상대 돌을 잡으려다가는 본인 돌이 죽게 되는 상황. 흑과 백, 어느 쪽도 뛰어들지 않게 된다. 그렇게 바둑이 끝날 때까지 내버려 둔다. 대마가 잡히는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빅을 만들면 궁지에 몰린 쪽은 기사회생이다. 빅 때문에 전체 승부가 바뀔 수도 있다.
사실 빅은 바둑 애호가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장면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모양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바둑의 무승부는 ‘장생(長生)’이다. 장생의 사전적 의미는 오래도록 삶이다. 바둑에서는 패(覇) 모양이 아닌데 사활에서 같은 모양이 반복되는 형태를 말한다. 장생의 어원은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불로장생(不老長生)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장생은 확률상 빅은 물론이고 홀인원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드문 장면이다. 유니콘처럼 상상 속 동물 같은 존재. 그런 게 있다는 것은 알지만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는 그런 존재.
2003년 국내 바둑리그인 KB리그에서 한국 최초의 장생 무승부가 나왔다. 공식 기전에서 처음 나온 장면이다. 프로 바둑기사 최철한과 안성준이 대국의 주인공이다. 장생 모양이 나오자 대국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심판위원 판단을 구했다. 결국 심판은 ‘재대국 없는 무승부’를 선언했다.
장생은 바둑판의 우담바라로 불린다. 우담바라는 불교경전에 있는 상상의 꽃이다. 장생 모양이 나타나면 바둑계에서는 길조로 여기고 의미를 부여한다.
장생은 생과 사를 가르는 운명의 갈림길에서 모두의 삶을 구하는 선택지다. 그런 의미에서 장생의 진정한 이름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상생(常生) 또는 서로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상생(相生)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