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방문한 청와대와 경복궁 인근 상권은 외국어 간판이 절반 이상 차지했다. 시민들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만큼 통일된 한글 간판이 새로운 경험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공병선 기자 mydillon@
원본보기 아이콘지난 4일 청와대 인근 서울 종로구 통의동엔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로 가득 찼다. 외국인들은 청와대 앞까지 이어지는 경복궁 돌담길 옆을 걸으며 서로 담소를 나눴다. 그들을 길을 걷다가 멈춰서서 서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사진 배경엔 영어로 적힌 간판들이 담겼다. OOO Cafe(카페), OOO Photo Studio(사진관), OOO Burger(햄버거) 등 영어로만 적힌 간판들이 줄지었다. 간혹 한글 간판을 단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직장인 김모씨(27)는 "청와대뿐만 아니라 경복궁도 있어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라며 "통일된 한글 간판이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할 것 같다"고 말했다.
6일 문화재청 등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 취임과 함께 개방된 청와대엔 지난해 5월10일부터 7개월 동안 약 280만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했다. 청와대 인근 상권 역시 청와대 개방과 함께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 됐다. 올해 청와대의 복합문화공간 조성을 위해 예산 217억원이 투입되는 등 관광객들이 꾸준히 이 일대를 방문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통의동과 효자동, 체부동 등 청와대 인근 상권의 간판은 '뒤죽박죽'이었다. 외국어만 적힌 간판이 전체 간판 가운데 절반을 차지했다. 간판 색깔도 노란색, 초록색, 검은색 등으로 통일성을 찾기 어려웠다. 인근 주민들은 청와대가 개방돼 많은 관광객이 찾는 만큼 한글 간판으로 통일되길 바랐다. 통의동 주민 지모씨(77)는 "한글 간판이 통일성 측면에서 보기 좋을 것 같다"면서 "외국어로 쓰여 있는 간판 때문에 청와대 인근에서 놀고 싶어도 불편함을 겪은 노인들이 한글 간판을 더욱 반길 것"이라고 밝혔다.
한글 간판이 관광객 증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도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서울 종로구 인사동은 과거 한글간판사업을 시작하기 전인 2005년만 해도 서울 전체 관광객 가운데 26.4%가 방문하던 곳이었다. 2008년 한글간판사업을 시작하면서 인사동을 찾는 관광객은 더욱 늘었다. 서울 전체 관광객 가운데 인사동을 찾은 관광객 비중은 33.4%를 나타냈다. 2019년에도 35.9%를 기록하는 등 이젠 인사동을 찾는 관광객 비중은 30%대를 안착했다.
한글 간판 설치는 주민들이 협의체를 구성해서 종로구청에 신청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종로구청은 '도로 단위'로 사업 대상을 선정해 지원금을 준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이달 신청을 받아 올해 한글 간판 설치 대상자를 정한다"며 "간판 교체 대상이 되면 업소당 300만원 이내로 지원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청와대 인근 상권의 간판이 빠르게 교체되기엔 한계가 있다. 결국 예산 문제다. 지난해 4억원이었던 한글간판사업 예산이 올해 2억원으로 줄었다. 지난 2년 간 8억원을 투입하는 등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예산의 한계에 직면한 것. 종로구청 관계자는 "한글간판사업 예산이 나오는 광고발전기금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광고발전기금의 재원은 범칙금, 과태료 등인데 코로나19로 인해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연체가 늘어 자연스레 예산도 빠듯해졌다"고 알렸다.
아울러 간판의 노후화도 살펴봐야 한다. 한 예로 간판 소재가 '파나 플렉스'면 간판 교체사업의 고려대상에 포함된다. 파나 플렉스 소재 간판은 전등에 천을 씌운 간판으로 가성비가 좋아 길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인상 보기 좋지 않고 소각할 때 발암물질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효자동, 통의동, 체부동 등 이 일대 간판이 파나 플렉스 소재로 돼 있는 등 노후화됐는지 먼저 확인해봐야 한다는 게 종로구청 측 설명이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에 왔을 때 쉽게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은 한글 간판을 마주치게 하는 것"이라며 "영어, 스페인어 등 해외에서 보기 힘든 글자이기에 한국만의 독특한 경험을 관광객들에게 선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