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때릴수록 웃는다'…의원님의 '쪽지 예산'

올해 예산심사도 밀실서 여야 주고받기
국회의원, 4년마다 총선 통해 심판…예산 민원 창구
밀실서 이뤄지는 지역예산, 꼭 필요한 예산 배정 못하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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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주 기자] "기자님, 혹시 지역구 예산안 기사 쓰실 때 저희 의원님 빠뜨리시면 안 됩니다!"


국회 선진화법이 만들어진 이후 가장 늦은 예산안 통과되려는 시점, 한 국회의원 보좌진으로부터 이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받았다. 이후 의원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자신의 지역구에서 증액된 예산 내역을 기자들에게 뿌렸다.

매년 의원들은 없던 예산도 만들어냈다. 특히 당 지도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등이 앞장을 섰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역구인 부여군이 추진하고 있는 동아시아 역사도시진흥원 건립 예산을 12억5000만원 순증시켰다. 세종시와 공주역을 연결하는 광역 간선급행버스(BRT) 구축 예산도 14억원 증액했다. 성일종 정책위의장도 정부안에 없던 대산·당진고속도로 건설 예산 80억원을 만들어냈다. 이른바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으로 불리는 권성동 의원은 지역구 하수관로 정비 예산 등으로 15억원, 장제원 의원도 재해위험지구 정비사업 예산을 기존 정부안보다 23억4500만원 늘렸다. 배현진·박수영 의원 등도 모두 자신의 지역구 예산을 두둑하게 챙겼다.


더불어민주당에선 위성곤 원내정책수석부대표가 정부안에 없던 서귀포시 유기성바이오가스화 사업 예산 62억2200만원을, 예결위 야당 간사인 박정 의원(경기 파주을)도 0원이던 파주 음악전용공연장 예산 30억원과 문산·법원 도로 확장 설계 용역비 2억원을 확보했다.


특정 의원들만 지역구 예산을 챙긴 것은 아니다. 대부분 의원들도 자신의 지역구 예산 챙기기에 혈안이 된다. 국회에서 예산을 검토하는 시기가 되면 비공식적으로 의원별 예산을 받는 창구가 정해진다. 각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예산을 쪽지 형태로 주고받으면서 기획재정부에 전달해 증액을 검토시킨다. 회의록도 남지 않는 '소소위'를 통해 의원들은 앞다퉈 지역구 예산을 증액시켜 달라며 민원을 넣는다.

지역구 예산을 챙기는 동안 서민 경제, 약자를 위한 예산은 얼마나 챙겼을까. 내년도 예산을 살펴보면 엉뚱하게도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선 공약이었던 공공임대주택 예산 6630억원, 지역사랑상품권 3525억원 등이 민생경제와 취약계층 지원으로 둔갑해 1조원 넘게 늘었다. 민생경제 및 취약계층을 위한 예산으로 증액된 1조7000억원의 절반이 넘는다. 민생경제란 꼬리표와 취약계층 지원 예산도 결국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 결과였던 셈이다.


여론의 거센 비판에도 매년 쪽지예산 구태가 반복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4년마다 총선을 통해 지역 주민들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정부는 새해 예산안을 통해 지방자치단체 등에 대한 사업비를 지원하는데 이때 제대로 배정받지 못한 지역구 민원이 의원실을 압박한다. 제대로 예산안을 확보하지 못한 의원은 다음 총선에서 '무능함'을 심판받는다는 것이 대다수 의원들의 설명이다. 매년 언론에서 '밀실 예산', '짬짬이', '구태' 등의 표현을 동원해 비판하는데도 보란 듯이 기자회견까지 열어 예산 확보를 홍보하는 이유다.


그러나 예산 배정이 아예 밀실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사업 타당성 자체를 검증받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나라 살림은 한정됐는데 예정에도 없던 지역구 민원 예산이 증액되면 꼭 필요한 다른 예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매년 반복되는 이런 구태를 바로잡자는 목소리는 계속되지만, 비공개로 이뤄지는 ‘밀실 회의’에서 여야 간 담판으로 결정되는 이런 예산심사 과정이 계속되는 한 지역구 예산을 나눠 먹는 몰염치한 행태는 계속될 것이다. 국회의 예산심사 제도 손질이 필요하다.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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