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TV 드라마나 영화 수사물에서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헝클어진 머리를 한 형사는 공소시효 1시간을 앞두고 유력한 용의자를 검거, 조사하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맡긴 DNA 대조 결과가 1시간 늦게 도착하거나, 증거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 사건은 미궁 속에 빠진다. 그때 후배 형사가 숨을 헐떡이며 조사실로 들어와, 국과수 DNA 대조 결과, 범인이 맞는다는 소식을 전한다. 범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자백을 한다.
지금이야 이른바 'DNA 수사' 기법을 영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실무에 도입하고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90년대로 알려졌다. 이렇다 보니 그전에 일어난 잔혹한 사건들은 그 실체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 경우도 있다. 미제사건이 과거에 많이 몰려있는 이유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DNA 수사 기법으로 명백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과거의 미제사건도 해결한다. 최근에도 미제로 남아있던 성폭행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이 사건은 당시 목격자나 다른 증거가 없어 피의자를 특정하지 못해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10일 제주동부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2008년께 제주에서 A씨를 특수강간한 혐의로 40대 남성 B씨가 입건됐다. 앞서 B씨는 다른 사건으로 입건되면서 조사를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국과수 데이터베이스(DB)에 남아있는 DNA 대조를 통해 B씨의 DNA가 14년 전 미제사건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법원은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경찰은 보강 수사를 통해 구속영장 재신청을 검토 중이다.
범인 식별에 사용하는 사람마다 다른 고유한 'DNA 지문'은 유전정보 없이 염기서열이 반복되는 구간이다. 손가락 지문처럼 사람을 식별하는 데 사용한다. DNA는 네 가지 염기(구아닌, 시토신, 티민, 아데닌)로 구성돼 있다. 한 사람의 세포 내 핵 DNA에 있는 특정 배열이 다른 사람과 같을 확률은 10의 15제곱분의 1이다. 자신의 DNA가 다른 사람과의 DNA와 일치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는 얘기다.
이렇게 범행 현장에서 경찰이 확보한 DNA는 '중합효소연쇄반응'(PCR·Polymerase Chain Reaction) 과정을 거친다. PCR로 불리는 이 과정은 꼭 필요한데, DNA가 범죄 현장에서 많이 발견되다 보니 훼손되고 불완전할 수 있어, 현장에서 확보한 DNA 그 자체만으로는 용의자들의 DNA와 대조하거나 특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PCR 과정에서 핵심은 '증폭'(사물의 범위가 늘어나 커짐 또는 사물의 범위를 넓혀 크게 한다는 뜻)이다. DNA를 유전자분석에 활용하려면 충분한 양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어 유전자자동염기서열분식기 같은 장비를 이용해 유전자형을 확정한다.
범인 잡는 PCR 과정은 1983년 미국의 생화학자 캐리 멀리스가 개발했는데, 생물학 연구의 일대 혁신을 일으켰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경찰이 이를 수사기법에 활용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국내에서는 1989년에 DNA 수사기법이 도입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수사 방법 자체가 보편적이지 않았으며 DNA 확보 등 관련 기술 역시 초기 단계라, DNA 정보 분석이 어려웠다.
그 사이 연쇄살인범 이춘재는 1980년~1990년대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 수사망을 피해가고 있었으니, 피해자들을 떠올리면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이춘재도 결국 DNA 수사 앞에 자신의 범죄를 인정했다. 이춘재는 1994년 처제 살해 후 무기수로 복역하며, 연쇄살인사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사건 증거물에서 검출된 DNA 분석 결과를 들이대자 결국 자백했다. 국과수는 5·7·9차 사건 증거품에서 동일인 DNA를 확인했다. 이춘재는 2020년 11월2일 '8차 사건' 재심 증인으로 출석해 "내가 화성연쇄살인사건 진범이 맞다"고 증언했다.
이춘재 사건과 같이 수십년간 장기 미제로 남아있던 사건이 해결된 또 다른 사례도 있다. 2001년 7월 한 가정집에 침입한 남성은 피해자를 무참히 폭행하고 성폭행했다. 당시 경찰은 정액이 묻은 수건에서 범인의 DNA를 확보했지만, 일치자를 확인 못 해 범인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2021년 7월 DB에 등록된 한 강간 살인범의 DNA가 20년 전 당시 강간범의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검거했다. 공소시효 만료 5개월을 앞둔 상황이었다.
또 1997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 골프연습장 주차장에서 당시 20세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고 사망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2020년 재수사 과정 중 피해자 신체에서 채취한 범인의 DNA와 당시 강도·살인 혐의로 무기수 복역 중이던 C씨의 DNA가 일치한 것으로 확인, 22년 만에 범인을 잡았다.
DNA를 이용한 수사는 범인의 알리바이를 무너뜨리거나, 증거의 명백한 근거로도 활용된다. 2004년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 관련 연쇄살인범의 범행을 입증하는 결정적 단서인 둔기와 오피스텔의 증거물에서 피해자들의 DNA형을 검출함으로써 범행 정황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와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다. 또 2018년 광주 집단 폭행 사건 관련해 DNA 감정관의 현장 감식을 통해 혈흔이 묻은 나뭇가지 등을 추가로 발견하여 사건의 증거를 확보하는 등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입증했다.
그런가 하면 출소를 앞둔 한 재소자를 또 다른 사건의 용의자로 특정, 재구속한 사례도 있다. 아동성폭행범 김근식은 2006년 인천에서 13세 미만 아동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 10월16일 출소 하루 전 재구속됐다. 검찰은 2006년 성범죄 미제사건에 첨부된 신원미상 범인의 DNA 분석 자료를 확인했고, 김근식의 DNA와 대조한 결과, 검찰청으로부터 두 정보가 일치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결국 김근식은 범행을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김근식은 2006년 5∼9월 수도권에서 미성년자 11명을 성폭행한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 복역 중이었다.
일련의 사례를 종합하면 DNA 수사 기법으로 현재 일어나는 범죄는 물론 과거에 일어난 범행도 더 완전 범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수사 관련 통계에서도 범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잡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DNA 신원확인 정보 데이터베이스 관리위원회의 연례 운영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DNA법)' 시행 이후 11년간 DNA 일치로 수사를 재개한 미제사건은 총 6369건이다.
DNA를 통해 해결한 미제사건 유형을 보면 절도(4084건)가 가장 많고 성폭력(1015건), 강도(264건), 마약(165건), 폭력(137건), 방화(43건), 살인(38건) 순이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DNA 대조를 통해 많은 사건이 해결되고 있다. DNA 과학 분석 기법이 발달하면서 '완전 범죄는 없다' , '암수범죄(범죄는 발생했지만, 용의자 신원 파악 등이 안 돼 공식통계에 잡히지 않은 범죄)' 실마리를 푸는 열쇠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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