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한예주 기자] 정부가 국내 첨단산업 기술보호를 위해 전문임기제 특허심사관을 공개 채용키로 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인원에 실효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특허청이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의 특허 심사 경쟁력을 높이려면 최소 200명 가량 심사관을 늘릴 것을 건의했지만 ‘작은 정부’ 기조에 막혀 30명으로 대폭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기술 패권 전쟁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국제 수준에 맞는 특허 심사환경이 구축돼야 특허 쟁탈전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와 업계의 지적이다.
17일 정부 부처 및 업계에 따르면 특허청은 반도체 분야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을 위해 내달 1일부터 7일까지 전문임기제 특허심사관 채용 원서 접수를 받는다. 모집인원은 총 30명이다. 분야별로는 ▲반도체 설계·소재 분야(4명) ▲노광·증착 분야(6명) ▲식각·세정·기판 분야(6명) ▲조립·검사·패키징 분야(4명) ▲소재 분야(6명) ▲디스플레이 특화기술 분야(4명) 등으로 세분된다. 지원 자격은 반도체 기술 관련 경력과 학위 보유자다. 특허청은 서류전형과 면접시험을 거쳐 내년 2월 중 최종 합격자를 발표할 예정이다.
특허청은 윤석열 대통령이 핵심 국정과제로 꼽은 ‘반도체 초격차 확보’ 실현을 위한 실천 과제로 첨단기술 특허 보호를 위한 인력 강화에 나섰다. 이를 위해 반도체 민간 퇴직인력을 활용, 이들의 해외 기술유출 방지와 전문성을 활용해 특허를 심사하기로 했다. 최근 해외 기업들이 퇴직인력을 채용해서 기술을 빼가는 행태가 이어지자 전문인력 채용을 통해 인력유출을 방지하고 기술 유출도 방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글로벌 최대 기술 격전지로 부각되고 있는 반도체에 심사 역량을 집중하면서 1년이 넘게 걸리던 관련 특허 심사 기간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이 증원 요청안은 반도체 분야 민간기업 퇴직인력을 한시적으로 심사관으로 활용해 비교적 재정 지출도 적은 방안으로 꼽힌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계획보다 채용 규모가 크게 축소됐다는 점에 대해 아쉽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국내 특허심사관 수가 주요국과 비교해 매우 적고, 1인당 심사 건수가 가장 많은 상황에서 실효성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당초 특허청 내부적으론 미국·중국·유럽·일본 등 주요 경쟁국 수준으로 특허심사 경쟁력을 높이려면 5년간 반도체를 포함해 1200여명 이상을 늘려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공공 분야 인력 감축 기조에 맞춰 반도체 분야 인력 200명만 우선 요청했으나 67명을 승인받았고, 기획재정부 협의를 거쳐 그마저 30명으로 반토막 나고 말았다.
실제 국내 특허 심사관의 업무량은 미국·중국·유럽·일본 등 주요 경쟁국과 비교했을 때 최대 3배 이상이다. 1인당 심사 처리 건수는 197건으로 가장 많고, 심사관이 다뤄야 할 기술범위(국제특허분류·IPC)도 80건으로 가장 넓다. 1건당 심사 투입 시간은 11시간으로 가장 짧다. 유럽 34.5시간, 미국 29시간, 중국 22시간, 일본 16.7시간과 비교해도 과중한 업무량이다.
심사의 질이 떨어지면서 특허 무효율도 높아지고 있다. 특허청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2012∼2021년) 반도체 특허 무효율은 56.9%에 달했다. 국내에 출원된 반도체 특허 심사 10건 중 5건가량이 출원 이후 무효가 되는 셈이다. 전체 특허 무효율(48.6%)보다 8.3%포인트 높은 수치로 반도체 특허 심사가 허술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지난해 일본과 미국의 특허 무효율이 각각 24.3%, 25.3%인 점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특허 무효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핵심 특허 확보를 위한 기술 패권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3나노(nm·10억분의 1m) 반도체 등 차세대 기술 개발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에서 신속한 특허 획득의 시급성에 맞춰 심사관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반도체 전문가는 "공무원 인원 감축도 필요하지만,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이라는 중대한 국정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가 특허 심사 인력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기술 패권 경쟁의 핵심 무기인 특허 품질 개선을 위해 장기적 안목으로 국제 수준과 부합하는 특허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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