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 일본은 세계 3위의 경제 대국 지위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후진국'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국가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한국이 신속한 재난 내응에 나섰던 것과 달리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들은 팩스와 수작업으로 확진자 수를 집계했다. 행정기관들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관리하면서 백신 접종 증명서 발급 등 개인을 식별해야 하는 업무에도 큰 차질이 생겼다.
재난 상황에서 행정의 비효율성이 증대되자 일본 정부가 꺼내든 카드는 일본판 '주민등록제도'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공인인증서 기능을 합친 형태인 '마이넘버 카드'를 보급해 전 국민의 정보를 전자화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일본의 문화와 여론의 반대로 이 제도가 일본 사회에 안착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일본 정부가 마이넘버 카드 도입에 주력하는 이유는 관공서마다 각기 다른 정보 관리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가제도' 즉 호주제를 도입하는데 1948년 이를 폐지하기로 결정한다. 가족 단위를 호주와 그에 딸린 식솔로 묶는다는 개념이 양성평등에 기초한 새 헌법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호주제 폐지 이후 개인정보를 식별할 방안이 사라지자 각 관공서는 '주민표 코드'와 '기초 연금 번호' 등을 개인에게 부여해 독자적으로 행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기관들이 통일되지 않은 방식을 사용하다 보니 개인정보를 조회해야 할 때면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문제가 생겼다.
행정 절차를 밟는 도중 관공서 간의 정보 연계가 필요해지면 여러 곳에 서류를 이중 제출을 해야 하는 불편이 생기기도 했다. 행정기관들이 타 기관과 데이터를 교환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해 두지 않고 정보 입력 방식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이중으로 서류를 보내는 과정에서 두 서류에 담긴 정보가 일치하지 않아 간단한 주소 변경 신고마저도 애를 먹는 경우가 빈번하게 생겼다.
일본 정부는 마이넘버 카드의 발급률이 늘어나면 재난 대응과 세금 납부, 사회 보장 세 가지 측면에서 행정 효율성이 극대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이넘버 카드에는 개인마다 다른 12자리의 숫자가 부여되는데 이 숫자와 지자체가 가지고 있는 개인정보를 연결하면 행정기관 간에 수월한 정보 공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2016년부터 카드 발급을 장려했음에도 여전히 전 국민의 발급률이 절반을 넘지 못했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의 마이넘버 카드 발급률은 49%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39%에 불과했던 발급률은 정부가 카드 발급 시 최대 2만엔(약 19만원)어치 포인트를 제공하는 특단책을 펼치면서 상승했다.
일본 국민들이 카드 발급을 꺼리는 이유는 개인정보 누출에 대한 걱정과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특성 때문으로 분석된다. 아사히 신문은 국민들이 "국가가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는 점도 카드 발급률이 저조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NHK 역시 한국의 주민등록제도와 일본의 마이넘버 카드를 비교하며 국가가 개인정보를 수입하는 제도에 경계감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NHK는 "한국의 빠른 코로나 대응이 주민등록번호 제도" 덕분이라면서도 "국가가 좋은 목적으로 정보를 사용한다고 해도 국민이 이를 허용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만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다만 일각에서는 재난 상황에서 신속한 대응을 위해 효율적인 개인 식별 제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일본 정부가 지난해 12월 출시한 접종 증명서 애플리케이션은 개인 정보 식별 문제로 공개 첫날부터 오류를 일으키며 먹통이 됐다. 지자체가 1억명에 달하는 개인별 접종기록을 시스템에 일일이 수작업으로 입력하면서 오류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사히 신문은 "마이넘버 카드는 IC칩 안에 개인정보가 축적돼 있어 이를 통해 지자체와 병원 진료기록 등을 일원화해서 관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다만 정부가 그 편리성에 대해 국민에게 정보 수집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마이넘버 카드 도입 외에도 일본 정부는 행정 체제를 디지털 방식으로 개편하기 위해 팩스 퇴출에도 힘쓰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국민들과 관료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부딪혀 난항을 겪고 있는 모양새다.
요미우리 신문은 지난해 8월 고노 다로 디지털청 디지털담당 장관이 중앙 부처에서 팩스를 퇴출하겠다고 나서자 관료들로부터 팩스 유지를 요구하는 항의가 400여건가량 쇄도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이메일 시스템은 보안이 취약하고 천재지변이 발생할 경우 통신이 마비될 수 있다며 예비용 팩스를 비치할 것을 건의했다.
NHK는 "일본이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하면서 스마트폰 사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노인인구가 늘어 팩스를 애용하는 문화가 굳어졌으며 이러한 문화는 쉽게 사라지기 힘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밖에도 고노 장관은 스가 요시히데 내각에서 행정개혁 장관을 맡고 있던 지난해 6월, 서류를 작성할 때 꼭 도장을 찍도록 하는 날인 의무를 폐지를 추진하고 나섰다.
그러나 아날로그 문화를 고수하려는 집단의 반발로 인해 고노 장관의 '탈 도장' 정책 역시 힘을 잃었다 1700억엔 규모의 도장 산업 이해관계자들이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또한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시행해도 사원들이 도장을 찍기 위해 회사에 출근하는 등 도장을 중시하는 문화가 공적인 영역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아날로그 문화를 탈피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을 두고 “일본 사무실에서는 2020년 초까지 팩스나 대면 회의, 종이로 된 계약서에 날인이 표준이었다”며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전통에 얽매인 하이테크 국가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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