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배경환 기자] 국내 정치사에서 보기 힘든 대통령의 조문 외교가 시작됐다. 1박 2일간의 짧은 일정으로 윤석열 대통령은 18일(이하 현지 시각) 오후 영국 런던에 도착,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조문 일정에 돌입했다. 당초 예정됐던 일부 일정이 현지 사정으로 취소되는 등 변수가 생겼지만 200여개국, 500여명의 주요국 대통령과 총리, 고위 인사 등을 포함해 2000명가량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점을 감안하면 지구상 최대 외교의 장이 열린 셈이다.
영국은 자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200개국에 초청장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미얀마는 군부의 민간인 학살 문제로 참석하지 못했다. 북한과 니카라과에서는 국가원수 대신 대사만 초청됐다. 영국에서 1965년 이뤄진 처칠 전 총리 장례 후 반세기 이상 국장이 없었던 탓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는 그만큼 규모가 큰 애도 행사가 됐다.
조문이 이뤄지는 자리인 탓에 서로간 간단한 인사를 나누는 자리지만 향후 정상회담을 약속하거나 주요 현안에 대해 간단한 입장을 주고받는 시간이 마련될 수도 있다. 윤 대통령 역시 런던에 도착한 후 영국 런던 버킹엄궁에서 찰스 3세 국왕 주최로 열린 리셉션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를 비롯해 바이든 대통령, 마크롱 대통령, 샤를 미셸 EU 상임의장,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등을 만나 환담하기도 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유엔총회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리셉션에는 나루히토 일왕, 요르단 국왕 부부를 비롯한 상당수 왕실 인사들도 참석했다.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서도 조문 외교에 나서 국제 무대에서의 입지를 다진 경우가 있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두 정상은 '식민지배를 통절히 반성한다'는 내용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발표했던 관계로 한국은 김 전 대통령의 조문을 계기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모리 요시로 신임 총리 간 3국 정상회담을 갖는 기반을 확보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2015년 3월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장례식에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참석했다. 박 전 대통령과 리콴유 전 총리는 직접적인 관계보다 과거의 인연으로 엮인 경우다. 리콴유 전 총리는 자서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거론하며 당시 영부인 역할을 맡은 박 전 대통령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에도 국내 언론들은 한일정상회담 가능성을 점쳤다. 경색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일관계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아직 정상회담을 하지 못한 아베 총리와의 만남에 주목했다. 결국에는 정식 회담이 아닌 가벼운 환담을 나눈 게 전부였지만 두 정상은 결국 같은해 1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독도 영유권 ▲자위대 한반도 진입 ▲일본산 수산물 수입제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등의 현안을 놓고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조문 외교에 나서기는 했다. 당시 신분은 대통령 당선인 겸 대통령 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다. 정치권에서는 케네디 전 대통령 장례식에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것을 '정치적 답례'로 보고 있다. 5·16 쿠데타 직후 자신을 초청해 준 케네디에 대한 답례 차원에서다.
이달 27일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는 아베 전 총리 국장에는 한덕수 국무총리가 참석한다. 조문사절단은 한 총리(단장), 정진석 국회부의장(부단장), 윤덕민 주일대사, 유흥수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전 주일대사)으로 구성된다. 한 총리는 국장 외에 일본 정·관계 및 재계 주요인사 면담 및 동포대표 초청 간담회 일정 등을 가질 예정이다. 윤 대통령은 앞서 국내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윤 대통령은 조문록에 직접 추모 글을 남기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고(故) 아베 신조 전(前) 총리님의 명복을 기원한다"며 "유족과 일본 국민들께도 깊은 위로를 표한다"고 적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한국과 일본이 앞으로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를 바란다"는 외교의 메시지도 빼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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