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춘희 기자] 미국과 중국의 첨단 기술 패권 싸움이 반도체를 넘어 바이오·의료기기 분야까지 확전되고 있다.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자국 내 바이오 산업 육성을 위해 20억달러(약 2조7880억원) 이상을 투입하기로 한 가운데 중국에서도 병원 등에 외국산 의료장비 공급을 배제하는 등 양측의 미래 먹거리 싸움이 점차 번지고 있다.
미·중 갈등의 한가운데 낀 한국 바이오·의료기기 업계에서는 적절한 대응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중대 과제로 떠오른 이유다. 바이오산업 면에서는 일종의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분석이 나오지만 의료기기 업계에서는 기술 경쟁력 확보 없이는 주요 시장인 중국을 놓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오 업계에서는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들이 스스로 위탁개발생산(CDMO) 비중을 늘리고 있고 진입장벽이 높은 산업의 특성상 미국의 행정명령에 따른 타격이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셀트리온 그룹은 "행정명령 상세안을 검토한 결과 현재까지 셀트리온 그룹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입장문을 냈다. 정유경 신영증권 연구원은 "이번 행정명령의 즉각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며 "CDMO는 복수의 생산거점 확보를 위해 이용되고 상당한 물량을 위탁하므로 미국 내 생산만으로 전환하기는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장도 "바이오의약품은 전기차 등과 달리 적극적인 보조금 정책 등을 펼치기도 쉽지 않아 국내 산업에 미칠 타격이 크지 않다"면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산업 육성책을 펼치겠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미국 진출을 고민해 온 업체에서는 오히려 적극적 투자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도 캘리포니아주, 워싱턴주 등을 신규 공장 후보지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셀트리온 측도 "인센티브 제도 등을 면밀히 검토해 유리하다고 판단될 경우 미국 내 직접 생산시설 확보도 적극 검토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반면 의료기기 산업은 중국의 외산 의료기기 억제 정책이 현실화할 경우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 일본, 독일 등 의료기기 선진국뿐 아니라 최근 중국 시장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는 국내 기업들도 피해가 예상된다.
한국무역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중국의 의료기기 시장 규모는 192조원으로, 세계 최대 의료기기 시장을 갖춘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성장했다. 국내 수출 비중 역시 크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에 수출된 의료기기는 7억2800만달러(약 1조원) 규모로 미국(9억1600만달러)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유행 영향으로 다소 주춤했지만 다시 전년 대비 34.9%나 증가하면서 수출 성장세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주력 품목인 임플란트, 초음파 영상 진단기를 중심으로 수출액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외산 의료기기 억제가 이뤄진다면 이 같은 성장세가 급격히 꺾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의료기기 업계 관계자는 "의약품과 달리 의료기기는 공산품에 가깝다"며 "중국 정부가 의료기기 핵심부품에 대한 국산화율 제고를 몇 년 전부터 강조해온 만큼 수입 대체가 빠르게 이뤄질 가능성도 높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국내 의료기기 업체들이 기술력 격차를 유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란 지적이 제기된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초음파, 자기공명영상장치(MRI) 등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의료기기는 아직도 중국 시장에서 외국 기업의 점유율이 80%대에 이른다"며 "대중 수출 주요 품목인 초음파 등 고부가가치 품목에서는 당장은 타격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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