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힘스케르크(네덜란드)=김영원 기자] "이곳의 비전은 병이 아니라 사람의 복지입니다. 이곳에 온 모두가 즐거운 하루를 보내다 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힘스케르크에 위치한 드 레이헤르스후버(De Reigershoeve) 케어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차량으로 한 시간가량 이동한 뒤 시골 마을에서 작은 골목으로 20분쯤 더 들어가 도착한 이곳은 요양시설이라기보다 정원 같았다. 전원주택처럼 옹기종기 모여있는 주택 앞 울타리 속에는 염소와 조랑말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울타리 바로 옆에서는 노인들이 햇볕을 쬐며 테라스에 모여 앉아 차 한잔과 함께 담소를 나눴다.
레이헤르스후버 케어팜은 헹크 스미스(Henk Smit)씨가 딸 디네커씨와 함께 설립한 중증 치매환자의 거주형 요양시설로, 기존 요양원과 달리 치매라는 질환보다 환자의 행복에 집중한다. 거주자들은 보통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 이곳에서 일상적인 삶을 누리다 생을 마감한다.
케어팜은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에서 시작돼 세계 전역에 퍼진 돌봄 방식이다. 치매 환자는 물론 연령과 관계없이 주의력 결핍 과다 행동장애(ADHD), 중독, 우울증 환자 등에게 다양한 형태의 돌봄·재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농장을 활용하는 형태다. 보통 질병이나 장애 유형별 구분 없이 다양한 환자를 수용하는 주간보호센터 방식으로 많이 운영되지만, 레이헤르스후버는 치매 환자만을 돌보는 거주형 케어팜이다.
헹크씨 부녀가 치매 환자만을 위한 거주형 케어팜을 설립하게 된 계기는 치매 가족을 둔 경험 때문이다. 헹크씨는 "장인어른과 어머니, 형이 치매를 앓았는데 요양원을 방문했을 때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지내는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면서 "불행한 요양원이 아닌 시설을 만들고자 했다"고 밝혔다.
부녀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 레이헤르스후버 케어팜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거실 형식의 건물과 거주자용 건물 4채로 구성돼 있다. 건물 한 채에 6~7명씩 총 27명의 치매 환자가 살고 있다. 거주자들은 중증 치매 환자이지만 일반 가정집 형태의 건물에서 자유롭게 안팎을 오가고 마음 가는 대로 하루를 보낸다. ‘병보다 사람’이라는 취지를 고려해 헹크씨가 가장 노력한 점은 건물 안팎을 집 같은 분위기로 만드는 것이다. 거주 공간에서 환자들은 1인 1실을 쓰고, 원래 집에서 사용하던 소품, 침대를 가져와 사용하기도 한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각자의 취향대로 엽서, 그림 등을 붙여 꾸몄다. 심지어 환자에게 금기시되는 흡연, 음주까지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가능하다.
농장의 호박, 콩 등 작물이 식재료로도 활용되고 동물을 돌볼 수도 있지만, 의무로 하는 활동은 아니다. 헹크씨는 "따로 직원들이 작물들을 돌보고 있고, 거주자는 원한다면 할 수 있는 것"이라며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동물을 기른다"고 했다. 현장에서 동물과 함께하는 노인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된 모습이었다. 한 노인이 여물을 들고 중앙의 울타리로 다가서자 염소, 오리 등 동물들이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노인은 먹이를 주고도 10여분간 동물들에게 말을 걸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헹크씨는 "동물의 또 다른 부수 효과는 일반적으로 요양원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거주자들의 손녀·손자들도 이곳에 오는 것은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라며 "아이들이 농장에 오게 되면 거주자들도 좋아한다"고 소개했다.
10월에는 치매 환자들을 위한 임시 숙박시설 용도의 게스트하우스(Logeerhuis)도 새로 열 예정이다. 현재 3명까지 입주 가능한 공간이 확보됐고, 차차 7명까지 늘릴 계획이다. 헹크씨는 "치매 환자들은 보호자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할 경우 혼자 있지 못해 임시거처를 많이 찾는다"며 새로운 시설 구상 배경을 설명했다.
레이헤르스후버를 비롯해 네덜란드의 케어팜은 국가 보건복지 제도와 결합돼 있어 요양급여로 운영된다. 거주자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빈부와 관계없이 케어팜을 이용할 수 있다. 헹크씨는 "이용객의 비용 부담은 '제로(zero)', 즉 누구나 올 수 있는 공간"이라며 "이외에 기부금이 들어오면 온실을 짓거나 마구간 등을 짓는 데 사용한다"고 했다. 비용 부담이 없고 만족도가 높아 현재 대기 인원은 200여명에 달한다.
농장 형태이지만, 국가의 복지재정으로 운영되는 만큼 요양기관처럼 일정 수준 이상의 요양보호사를 고용하는 등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지역과 수용 인원 등에 따라 인력 기준에는 차이가 있다. 레이헤르스후버 케어팜의 직원 60명은 전원이 돌봄 교육 과정을 밟았고, 일부는 ‘케어팜 전문’ 교육을 받기도 했다. 헹크씨는 "이곳은 환자뿐 아니라 직원의 만족도도 높다"면서 "직원당 환자 수가 적고 고정된 스케줄이 짜여 있지 않아 시간 압박도 적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헹크씨 부녀의 레이헤르스후버 외에도 네덜란드 곳곳에 치매를 관리하는 케어팜이 있다. 에인트호벤 근방에 위치한 그루텐하우트(Grootenhout) 케어팜은 레이헤르스후버와 마찬가지로 치매 돌봄을 위한 거주형 케어팜이다. 비넨달시의 에이크후버(Eekhoeve) 케어팜은 발달장애 등 고객도 있지만, 노인 공간을 따로 분리해 치매 환자를 돌보고 있다.
전문가는 케어팜과 일반 요양시설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다양한 자율적 활동을 꼽았다. 조예원 바흐닝언케어팜연구소 대표는 "농장에서는 농업 외에도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데, 이를 통해 성취감과 자존감을 얻을 수 있다"며 "사람의 특성에 따라 동물, 요리, 목공 등 활동에 흥미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케어팜과 유사한 '치유 농업' '사회적 농업'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네덜란드형 모델과는 차이가 있다. 우선 건강보험과의 연계 등 보건복지 제도와 연결돼 있지 않다. 사회적 농업은 농림축산식품부, 치유 농업은 농촌진흥청 등 농업 관련 부처에서 관리하고 있다. 아울러 이 사업들은 주로 강사 위주로 짜여진 프로그램을 따르는 방식이다. 조 대표는 "국내에서는 (케어팜 관련 사업을) 단체로 강사 지도하에 2~3시간 체험하는 치료 프로그램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과 달리 네덜란드 케어팜의 목표는 돌봄과 의미 있는 하루"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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