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세종=김혜원 기자] #. 전남 남원에서 엽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는 60대 농부 김병률씨는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폭염에 2018년 악몽부터 떠올랐다. 역대급 불볕더위로 농사가 그야말로 폭삭 망해 가져다 팔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폭염일수는 35일로 근 10년래 가장 오랫동안, 무더운 해였다. 올해는 그때보다는 덜하지만 상황이 썩 나아진 것은 아니다. 폭염은 이제 일상이 됐다. 김씨는 "올해는 봄 가뭄에, 여름 폭염이 겹치면서 작황이 엉망"이라며 "열에 취약한 상추는 타버리고 고추는 말라 죽고 옥수수도 생장기에 피해를 입었다"고 토로했다. 복숭아는 상품 가치가 뚝 떨어져 B급은 투매 현상이 벌어지고 물량이 없는 A급은 가격이 폭등한 상태라고도 전했다. 농협 하나로마트에 납품하는 김씨는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엽채류와 과수류는 대부분 가격이 2~3배 이상 올랐다"고 했다. <관련기사> '폭염의 경제학'
가뭄에 이은 폭염이 ‘밥상물가’를 또 자극하고 있다. 이상기후로 인한 생산력 저하는 농가의 생존을 위협하고 만성적인 수급 불균형은 물가를 끌어올리는 상수로 자리 잡았다.
29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25일 현재 적상추(4kg) 도매 가격은 4만2160원으로 평년(2만9961원) 대비 40.7% 올랐다. 특용작물 중 느타리버섯(2kg)은 1만7975원으로 1년 전(7274원)보다 147%나 급등했다. 돼지고기 가격은 평년보다 높은 kg당 5000~6000원 선에서 움직이고 있다.
농식품과 축산물 가격이 가파른 상승 곡선을 보이는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곡물 파동으로 사료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게 1차적 이유다. 정부가 사료비 지원에 나섰지만 생산비용을 감당하기 힘겨운 수준이라는 게 현장의 공통된 목소리다. 여기에 봄 가뭄이 심해 타격을 입은 데 폭염까지 겹치면서 추가 피해를 입었다.
식량작물 중 감자의 경우 7월 이른 폭염 속에 종종 비가 내리면서 최악의 고온 다습 조건을 맞았다. 불가피한 병해 발생이 늘어 가격이 최소 두 배 이상 올랐다. 참깨와 땅콩도 고온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수분 부족으로 각종 병충해를 입었다. 채소류는 강한 햇볕에 노출되면 뿌리 기능이 약화해 잎의 끝이 썩거나 말라 죽는 ‘팁 번(tip burn)’ 현상을 피해갈 수가 없다.
축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고온 스트레스로 소나 돼지, 닭이 사료 섭취를 거부하고 소화율도 떨어져 발육이 나빠진다. 이는 산유량이나 산란율 감소로 이어져 가격 인상 요인이 된다. 폭염이 극심해지면 번식 장애는 물론 일사병이나 열사병으로 가축이 폐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전북 익산에서 축산업을 하는 이만송씨는 "영양소 보충제를 곁들여 겨우 사료를 밀어넣다시피 한다"면서 "축사 내 적정 열량지수를 유지하기 위해 지붕에 물을 수시로 뿌려도 역부족"이라고 전했다.
올해는 7월 27일 현재 폭염일수(일 최고기온이 33℃ 이상인 날의 수)가 총 7일로, 근 10년래 9위권에 머물러 있으나 8월 통계를 합산하면 2018년(35일)이나 2016년(24일), 2021년(18일)에 근접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올해 여름철(7~8월) 평균 기온이 평년보다 높을 확률은 50%로 관측됐다. 2012~2021년 평균 폭염일수는 14.6일로 연대별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폭염 시작일도 1990년대는 7월 11일, 2000년대는 7월 7일, 2010년대는 7월 2일로 발생일이 빨라지고 있다. 여름 기간 자체도 최근 30년이 117일로, 과거 30년(98일) 대비 19일 길어졌다.
박승무 농촌진흥청 농업기상환경팀장은 "미래 중반기와 후반기 우리나라 연평균 기온은 현재 대비 고탄소 시나리오에서는 2.9~6.3℃, 저탄소 시나리오에서는 1.6~2.3℃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전 세계적인 이상기후로 양과 질 측면에서 농작물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폭염이 여름철 식품 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추석 등 가을철 물가에도 연쇄 충격을 주는 것으로 판단하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폭염 장기화 연도의 7~8월 물가 상승률이 연평균 물가 상승률보다 0.6%포인트 높았고 특히 농축수산물의 경우 평균 대비 3.8%포인트 높았다는 통계청 통계를 인용했다.
폭염을 딛고 사계절 내내 상추 같은 엽채류를 재배하는 ‘스마트’한 농가도 있다. 지난 25일 전북 김제 스마트팜혁신밸리에서 만난 류희경 그린바이트 대표는 "작물도 생명체라서 생체리듬이 있는데 이상기후는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다"면서 "우리의 경우 수경 재배로 온실 내 최고 기온을 32~34도로 유지하면서 5.5주를 1작기로 상추를 재배해 중간 유통상에 납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류 대표는 "스마트팜이 많아질수록 궁극적으로는 시장 단가의 안정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농업 강국 네덜란드처럼 우리나라도 스마트팜으로의 전환은 가야 할 길이나 아직 갈 길이 먼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김제시가 관할하는 이곳 스마트팜 농장은 엽채소와 딸기 등 저온작물을 재배하는 복합동과 파프리카, 토마토, 오이 등을 키우는 과채동 등 총 10호로 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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