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밤에 아파트 일대를 순찰하는 경비원 장성근(이태훈). 어디선가 구슬픈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귀 기울여 발맘발맘 걸어가니 놀이터다. 철봉에 걸린 줄에 작은 고양이가 목이 졸린 채 매달려 있다. 장성근은 인근 땅을 파서 시체를 묻어준다. 퇴근하고 아침상을 차리는 아내(김민경)에게 한탄하며 쯧쯧거린다. "누가 그랬데?", "애들이 그런 거지 뭐, 저번에도 텔레비전에 나오던데.", "할 일들도 더럽게 없네."
영화 ‘초록밤’의 첫 시퀀스다. 윤서진 감독은 평범한 가족에게 벌어지는 내밀한 이야기를 다룬다. 모든 갈등과 상흔에는 예기치 못한 죽음이 있다. 장성근은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며 허망해한다. 누나와 동생이 부조금을 받으러 왔냐면서 싸워댄다. 동생에게 "철 좀 들라"고 지적하자 비난이 돌아온다. "오빠가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할 주제나 돼? 여기 지금 장례식장이 누구 때문에 마련된 건데."
돈 있는 사람이 큰 소리 내는 세상. 장성근은 이미 질릴 만큼 체감한 듯하다. 금전적 결핍. 아내는 그게 늘 불만이다. 차창 너머 일렬로 세워진 고층 아파트만 봐도 자동으로 한숨이 나온다. "집 없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저긴 다 누가 다 들어가서 사나 몰라. 예전에 분양받았던 아파트, 지금 많이 올랐겠지?" 아들 장원형(강길우)은 어머니의 푸념이 익숙하다. 가난이 대물림돼 결혼은 꿈도 못 꾼다. 오래 사귄 애인과 모텔을 전전한다.
‘초록밤’의 주된 배경은 아파트 등 부동산. 대한민국에서 부와 소득, 생활 수준의 불평등을 야기한다. 소유자에게 가치 상승은 세금이 붙지 않는 자본이득이다. 순자산이 늘어나고 부수적 효과로 소비도 늘어난다. 반면 부동산이 없는 사람은 임대 시장에서 더 높은 지대를 요구해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도 버겁다. 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가르는 경계선은 그렇게 넓어진다.
이런 역학 관계는 지난 10년 동안 계속됐다. 특히 장원형 같은 20~30대에게 뚜렷하게 나타났다. 집값이 오르고 집값과 소득의 차이가 벌어질수록 주택 소유 비용이 터무니없이 커졌다. ‘초록밤’은 도시 너머의 시골까지 들여다본다. 장성근은 아버지가 살던 집을 물려받는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숨겨온 내연녀가 살고 있다. 순간 장씨 가족 입장은 도시에서와 정반대가 된다. "길게 얘기 안 할게요. 부동산에 집 내놓았어요. 이제 가족들 계시는 곳 가셔서 편하게 지내셔야죠. 아버님 신분증이랑 국가유공자 연금 통장 가지고 계시죠? 그것도 도장이랑 좀 챙겨주세요."
유산 상속은 부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자가 보유율이 높은 집단은 40~60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나이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 장씨 부자는 그 길목에 들어섰지만, 처지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물려받은 집도 외딴 시골에 있지만 또 다른 죽음을 목도하고 인간성 상실을 자각했다. 자책하고 안타까워해도 소용없다.
여전히 세상은 초록 밤이다. 나무와 풀잎의 초록빛은 어둠에 가려 생기를 잃었다. 스산하고 우울하다 못해 섬뜩하다. 그들만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 주위를 감싼 초록색도 언제 짙어질지 모른다. 어둠과 노쇠, 죽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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