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담(手談)] 정치는 왜 바둑철학을 추앙할까

포석, 갈라치기…정치에 스며든 바둑용어
조바심에 눈이 먼 선택은 희망마저 ‘거세’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바둑에서 반상(盤上) 위에 돌을 놓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행위다. 흑과 백, 돌의 놓임에 따라 판의 흐름이 바뀐다.


일촉즉발의 충돌, 태평성대의 여유를 가르는 것은 단 한 수다. 세상을 창출하는 상상력. 바둑의 묘미는 정치와 맞닿아 있다. 실제로 여러 정치인이 바둑 철학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들이 바둑에 관한 관심을 넘어 추앙에 이르렀던 이유다.

사실 정치적인 뜻을 압축적으로 전하는 데 바둑 용어만큼 유용한 수단도 찾기 어렵다.

정치에서 많이 쓰는 대표적인 단어인 ‘포석(布石)’도 그중 하나다.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리는 밑그림을 검토하는 모습을 전할 때 국정 포석을 준비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포석은 바둑에서 유리한 흐름을 만들기 위한 초반 행마를 의미하는 말이다.

정치인이 선거에서 패배하거나 시련을 경험했을 때 지난 일을 되돌아본다는 의미를 일컫는 ‘복기(復棋)’라는 단어도 자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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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복기는 바둑을 마무리한 뒤 자기와 상대가 놓은 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놓아보는 과정을 의미한다.


여야 관계에서 상대의 실수를 유도하고자 덫을 놓는 행위를 일컫는 ‘꼼수’라는 단어도 있다. 바둑에서 꼼수는 치사한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한다. ‘정수(正手)’의 반대 의미를 담고 있다. 꼼수에 능한 자는 정치에서도, 바둑에서도 교활한 소인배 취급을 받는다.

묘수(妙手)는 정치인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단어다. 기막힌 선택으로 정치적인 난국을 단숨에 타개할 때 ‘묘수를 뒀다’라고 한다. 묘수는 바둑에서 대마(大馬)를 살리는 아주 뛰어난 수를 의미하는데 정치에서도 유사한 의미로 쓰인다.


정치에서 어떤 선택이 자기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을 의미하는 ‘자충수(自充手)’도 눈여겨볼 단어다. 본래 자충수는 바둑에서 생사를 놓고 다툼을 벌일 때 스스로 수를 줄이는, 즉 죽음의 길을 재촉하는 행위를 일컫는 단어다.


지난 대선에 자주 등장했던 단어인 ‘갈라치기’도 사실은 바둑 용어다. 바둑에서 상대의 돌이 두 귀에 있을 때 변의 중앙 부분에 돌을 놓는 행위를 의미한다.


바둑에서는 상대 세력을 약화하고 자기 삶을 꾀하는 선택인데 정치에서는 용어가 변질했다. 세대와 성별로 편을 가르고 싸움을 붙이는 방법으로 국민을 분열시켜 반사이익을 얻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밖에 현실 분석을 토대로 향후 전개될 상황을 예측해보는 ‘수읽기’와 어떻게 하든 손해 보지 않는 유리한 상황을 일컫는 ‘꽃놀이패’도 정치에서 즐겨 사용하는 대표적인 단어다.


정치 역사에 바둑 용어가 진하게 배어 있는 이유는 경험에서 비롯된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다. 바둑이 그러하듯 정치에서도 승패의 갈림길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때 상대의 어이없는 실수만 기다리거나 잔꾀로 삶을 꾀할 경우 대부분 뜻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


꼼수로 요행을 바라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패배를 통해 훗날을 도모하는 게 차라리 낫다. 조바심에 눈이 먼 선택이 미래의 희망마저 거세(去勢)하는 행동으로 귀결되는 장면은 우리 역사에 켜켜이 쌓여 있다. 이는 정치에서도 바둑에서도 그리고 인생에서도 곱씹어볼 만한 교훈이다.






류정민 문화스포츠부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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