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성폭력 피해 사실 보고' 여장교 성폭행한 해군 함장 유죄 취지 파기환송

서울 서초동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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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같은 부대에 근무하는 상관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한 사실을 보고한 부하 여장교를 성폭행한 해군 함장에 대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피해자 진술 중 일부가 신빙성이 의심된다고 해서 피해자의 진술 전부를 배척한 것은 잘못이라는 취지다.

31일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군인 등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A 해군 대령(범행 당시 중령)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군사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범행 경위에 관한 피해자 진술은 그 진술 내용의 주요한 부분, 즉 ‘피고인 A가 술을 마시던 중 양손으로 어깨에 가까운 팔 부위를 누르면서 몸 위로 올라와 강제로 키스하고 옷을 벗긴 후 간음하였다’는 부분은 수사기관에서부터 원심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경험의 법칙에 비춰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 A도 사건 당일 ‘침대 위에서’ 피해자에게 키스하고 피해자의 가슴을 만진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으므로, 피해자가 수사 초기 범행 장소에 관해 ‘침대 위’라고 지목하지 못한 채 ‘소파 같은 곳에 기대어 있었다’는 등으로 다소 불명확하게 진술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사정으로 삼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자의 진술은 사건 관련자들의 구체적인 진술을 통해 그 진실성이 뒷받침되고 있다"며 "피고인의 변소(辯訴. 변명하고 호소함) 내용은 피해자의 요구나 용인 아래 자연스럽게 신체접촉 행위를 했다는 취지이나, 그 구체적 내용은 일반의 통념에 비춰 자연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험의 법칙에 비춰 합리성이 없고, 이러한 사정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간접사실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그런데도 원심은 공소사실의 핵심 경위에 관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했다"며 "이러한 원심의 판단에는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2009년 소위로 임관한 뒤 2010년 A씨가 근무하던 해군 제1함대사령부 소속 부대로 배치된 초급 장교 B씨(당시 중위)는 직속상관인 함선 포술장 C 소령으로부터 여러 차례 강제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다.


성폭행 피해로 임신을 한 뒤 임신중절 수술까지 한 B씨는 이 같은 사실을 A씨에게 보고했지만, A씨는 B씨를 위로해주겠다는 등 핑계로 불러내 오히려 성폭행을 저질렀다.


사건 발생 이후에도 계속 복무를 하던 B씨는 결국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2017년 근무지를 이탈한 뒤 군 수사기관에 피해를 신고하고 A씨와 C씨를 고소했다.


A씨는 2010년 12월 초순경 티타임을 갖자는 명목으로 B씨를 자신의 영관장교 독신자 숙소로 부른 뒤 침대에 걸터앉은 B씨의 팔을 양손으로 강하게 잡고 침대에 눕혀 반항을 억압한 후 강간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입힌 혐의(군인 등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됐다.


C씨는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던 B씨를 2회 강간하고 10회 강체추행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입힌 혐의(군인 등 강간치상 및 군인 등 강제추행치상)로 기소됐다.


앞서 1심을 맡은 해군본부 보통군사법원은 A씨의 군인 등 강간치상 혐의 유죄를 인정, 징역 8년을 선고했다. 또 C씨에 대해서도 군인 등 강간치상 및 군인 등 강제추행치상 혐의 모두 유죄를 인정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을 맡은 고등군사법원에서 A씨와 C씨는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피해자 B씨의 진술 중 일부가 사실과 어긋나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이유였다.


먼저 A씨에 대해 2심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피해자의 진술은 범행으로부터 약 7년이 지난 후의 기억에 의존한 것인데 그 진술 내용에 모순이 되는 부분, 객관적인 정황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피해자의 기억 자체를 신뢰하기 어려운 반면, 피해자의 진술과 상반되는 피고인의 주장은 객관적인 정황에 비춰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여 쉽게 배척할 수 없다"며 "따라서 피해자의 진술은 의도적으로 행해진 허위의 진술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무죄를 선고한 이유를 밝혔다.


또 재판부는 "설령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그 진술만으로는 피고인이 폭행·협박이라는 수단을 써서 피해자를 강간했다는 공소사실이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왜냐하면 피해자의 진술에 따르더라도 피해자의 팔 윗부분을 붙잡은 피고인의 행위는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고, 피고인이 피해자의 반항을 제압하려는 의사나 인식에 따라 위와 같은 행위를 하했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수단이 된 폭행이나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렇게 볼 수 없다는 취지다.


C씨와 관련해서도 2심 재판부는 "범행 경위에 관한 피해자의 진술은 믿을 수 없다"며 "피해자의 진술에 따르더라도, 피고인이 피해자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해 피해자를 추행했다고 보기 어렵고, 피고인의 각 행위를 이른바 ‘기습추행’으로 평가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기습 추행'은 피해자 몰래 갑자기 껴안거나 입을 맞추는 등 피해자가 예상하지 못한 틈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발생된 추행을 의미한다.


또 재판부는 강간치상 혐의와 관련 "모텔에 가게 된 경위에 관한 피해자의 진술은 객관적인 증거나 정황에 배치돼 믿기 어렵다"며 "피해자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강간의 수단이 되는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 같은 A씨와 C씨에 대한 2심 무죄 판결은 대법원에서 서로 다른 결론에 다다랐다.


대법원에서도 피해자 B씨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되는지, 그리고 강간죄나 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인 폭행이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먼저 A씨와 관련 대법원은 앞서 소개한 것처럼 피해자 B씨의 진술이 일관되며, 일부 사실관계에 대한 기억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공소사실의 핵심 경위에 관한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한 것은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보고 2심 판결을 뒤집었다.


이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 배경으로 "형사재판에 있어서 유죄로 인정하기 위한 심증 형성의 정도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여야 하나, 이는 모든 가능한 의심을 배제할 정도에 이를 것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는 대법원 판결과 "강간죄에서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로 사실상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경우에 피고인의 진술이 경험의 법칙상 합리성이 없고 그 자체로 모순돼 믿을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직접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정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따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하거나 직접증거인 피해자 진술과 결합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간접정황이 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을 원용했다.


또 강간죄 성립을 위한 폭행이 있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과 관련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있었는지 여부는 그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해 피해자가 성교 당시 처했던 구체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고, 사후적으로 봐 피해자가 성교 이전에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원용됐다.


상명하복 관계에 있는 B씨가 다른 상관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한 사실을 알고 있던 A씨가 정신적·육체적으로 무력해진 B씨의 상태를 이용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강간에 대한 고의도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반면 대법원은 C씨에 대해서는 군검사의 상고를 모두 기각, 무죄를 선고하고 전자장치 부착명령 청구를 기각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먼저 재판부는 "형사재판에서 범죄사실에 대한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해야 하므로, 그와 같은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대법원 판결을 원용했다.


이어 "원심판결 이유를 살펴보면, 원심판결에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채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군인 등 강간치상죄와 군인 등 강제추행치상죄의 성립 요건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한편 재판부는 같은 부대 안에서 동일한 피해자를 상대로 벌어진 두 건의 성범죄 사건을 다르게 판단한 이유도 밝혔다.


재판부는 "사실인정의 전제로 이뤄지는 증거의 취사선택과 증명력에 대한 판단은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사실심 법원의 재량에 속한다"며 "인접한 시기에 같은 피해자를 상대로 저질러진 동종 범죄라도 각각의 범죄에 따라 범행의 구체적인 경위, 피해자와 피고인 사이의 관계, 피해자를 비롯한 관련 당사자의 진술 등이 다를 수 있다"고 전제했다.


이어 "따라서 사실심 법원은 인접한 시기에 같은 피해자를 상대로 저질러진 동종 범죄에 대해서도 각각의 범죄에 따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나 그 신빙성 유무를 기초로 한 범죄 성립 여부를 달리 판단할 수 있고, 이것이 실체적 진실발견과 인권보장이라는 형사소송의 이념에 부합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한편 피고인 A가 이 사건 공소사실 범행 일시와 인접한 시기에 이 사건 피해자에 대해 군인 등 강간치상죄를 저질렀다고 기소된 사건에서, 대법원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해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판결에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했다"며 "그러나 이 사건(B씨 사건)과 피고인 A 사건은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피해자의 진술 등이 서로 다르므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나 그 신빙성 유무를 기초로 한 범죄 성립 여부가 달리 판단될 수 있다"고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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