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지난 4일 강원도 삼척시 동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퍼진 산불이 닷새째 타오르고 있다. 수천명이 넘는 소방 인력이 투입돼 진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이미 화마는 서울 면적의 약 4분의 1, 여의도 면적의 58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산림을 불태웠다.
통상 한반도가 건조해지는 계절인 겨울·봄은 산불이 자주 일어난다. 수풀이 마르고 강풍이 잦으면 불씨가 옮겨다니기 용이한 탓이다. 그러나 올해 한반도 겨울은 기상청 관측 이래 역대 최악 수준의 가뭄을 경험하고 있고, 이에 따라 산불 등 재해 위험도 이전에 비해 훨씬 커졌다. 이상 기후가 동반한 '기후 재앙'의 위협이 한국 코앞까지 성큼 다가왔다는 우려가 나온다.
◆22년 만에 최악 산불…원전 근처까지 불태웠다
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이번 동해안 산불로 인해 이날 오전 6시까지 약 2만1772헥타르(ha)의 산림이 훼손됐다. 서울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며, 여의도 면적의 75.배에 육박하는 규모다.
산불이 퍼지면서 인근 지역 주민 수천명이 밤새 긴급대피를 했고, 주택을 포함한 570여개 시설이 화재로 소실됐다. 강원 동해에 있는 '어달산 봉수대' 등 문화재 피해도 1건 발생했다.
불씨가 확산하면서 국가 경제에 중요한 시설도 위협받았다. 산불이 울진 한울원전과 삼척 액화천연가스(LNG) 생산기지 인근으로 인접한 것이다.
6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산불 상황과 관련해 "LNG 시설이나 원전 등 사고가 발생하면 그 피해가 예측할 수 없이 크다"며 "만에 하나의 가능성까지 감안해 산불이 완전히 진화될 때까지 철저히 방어해 주기 바란다"라고 특별히 당부할 정도였다.
이번 산불은 지난 2000년 2만3794ha를 태운 동해안 산불 이후 22년 만에 최대 규모를 기록한 상태다. 현재 소방당국은 전국 소방동원령 2호를 발령하고, 산불을 진화하는 데 역량을 총집중하고 있다. 소방동원령은 대형 화재가 발생했을 때 부족한 소방력을 타 지역에서 지원받는 것으로, 2호는 상시 근무하는 전체 소방인력의 10%에 해당한다.
◆불씨 키운 역대 최악 가뭄과 강풍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에는 산불이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수량이 부족한 것에 반해 강풍은 많이 불어 작은 불씨라도 쉽게 옮겨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림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 동안 연평균 474건의 산불이 발생했고, 이 가운데 전체의 59%에 해당하는 280건이 봄 환절기에 집중됐다.
그러나 이번 동해안 산불의 피해는 예년에 비해 훨씬 막대하다. 지난 2020년에는 2920ha의 면적이 산불로 소실됐고, 전년(2019년)에는 3255ha가 불탔다. 그러나 올해에는 피해 규모가 벌써 1만6000ha를 넘어선 상태다.
왜 산불 피해가 이전보다 갑자기 심각해진 걸까. 산불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은 입산자의 실화, 담뱃불, 주택 화재가 옮겨붙는 비화 등 다양하지만, 불씨가 갑작스럽게 확산하는 이유는 '기후 변화'에도 있다.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1월 기준 전국 강수량은 2.6㎜를 기록했다. 평년(26.2㎜)에 비해 고작 10% 수준에 불과하며, 지난 1973년 이후 역대 최저치였다. 1월과 지난달을 합친 2개월간 강수량도 12.1㎜로, 35년 만에 최저 강수량을 기록했다.
심각한 가뭄으로 인해 현재 국내의 산들은 '바싹 마른' 상태다. 수분을 머금지 못해 쪼그라든 낙엽, 메마른 나무 등은 아주 작은 불씨라도 금세 활활 타오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지난 주말(5~6일) 동안 국내 일부 지역에는 초속 20~25m 이상의 태풍급 강풍이 불었다. 산불이 급격히 확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맞춰졌던 셈이다.
◆이상 기후 관측, 국내에서만 벌어지는 일 아냐
수십년 만에 최악 수준의 산불이 일어나자 시민들은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뉴스를 통해 동해안 산불 소식을 접했다는 20대 직장인 A씨는 "이런 대형 산불은 외국에서나 일어나는 건 줄 알았지, 한국에서 벌어질 줄은 몰랐다"라며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에서도 인근 지역 사진이 올라오는 데 너무 참혹하다"라고 토로했다.
산불이 일어난 강원 지역에 거주하는 누리꾼들도 바깥 풍경 사진을 공유하며 적극적으로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이들은 "산불 지역과 좀 떨어져 있는데도 공기에서 탄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해가 비치는 데도 하늘이 잿빛이다. 이런 날씨는 처음 경험한다" 등 우려 섞인 반응을 쏟아냈다.
지난 2019년 말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나우라 인근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번지는 모습. 소방관들이 주거지역을 향하는 불길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이상 기후는 국내에서만 관측되는 현상이 아니다. 지난달 미 금융 매체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남반구 국가인 브라질에서는 장기간의 가뭄과 폭염이 이어지면서 쌀·옥수수 등 생산량이 약 2520만톤 이상 감소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갑작스러운 가뭄이 이번 동해안 산불처럼 막대한 화재 피해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었다. 지난 2019년 9월 호주에서 시작된 산불은 이듬해까지 무려 6개월 동안 이어지며, 남한 전체 면적보다 더 넓은 땅을 태웠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지난해 9월 북동부에서 발생한 산불 '딕시'로 인해, 서울 전체 면적의 3배가 넘는 산림을 태우기도 했다.
◆국제 전문가들 "기후 변화가 대형 산불 초래"
국제 환경 전문가들은 앞으로 전 세계에서 산불 피해가 급격히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제연합 환경계획(UNEP)은 지난달 노르웨이의 환경단체 '그리드-아렌달'과 공동으로 '산불처럼 번지다-이례적인 산불 위협의 증가 보고서'를 출간했다.
이 보고서에서 UNEP는 오는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대형 산불이 14% 증가하고, 2050년까지는 30%, 세기말에는 50%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UNEP는 "가난한 나라들이 산불에 더 취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산불로 인한 주기적인 산림, 건물, 시설 파괴 등은 저소득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또 재가 섞인 연기를 흡입한 주민들이 호흡기 및 심혈관계 질환을 일으킬 위험도 있다고 내다봤다.
더 큰 문제는 산불이 기후 변화를 더욱 가속한다는 데 있다. 산불은 대기 온도를 높이고 습도를 떨어뜨려 가뭄을 심화하는 데다, 열대우림과 산림을 파괴해 지구의 자정 작용을 약화한다. 이로 인해 대형 산불 발생 가능성은 더 높아지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
이 연구에 참여한 샐리 아치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비트바르스란트대 교수는 영 매체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거대한 산불은 기후 변화로 초래되기 때문에 화재 예방만으로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다"라면서도 "국가의 화재 대응 능력을 강화하면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된다"라고 소방력 강화를 촉구했다.
국내 환경단체 '기후위기 비상행동' 소속 황인철 집행위원장은 "겨울에서 봄에 이르는 시기에 비, 눈 등이 내리지 않아 예년과 다르게 강수량이 크게 줄었다"라며 "지금 확대되는 산불 피해 또한 이런 기상 이변과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상 이변을 되돌리려는 노력의 성과가 단기간에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큰 틀에서는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환경 정책이 이뤄져야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며 "또 이전 정부까지는 기존 산불 패턴에 맞춰 대응 정책이 마련됐으나, 앞으로는 대형 산불이 더욱 빈번해지고 규모도 더 확대될 것이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재난 방지 대책도 필요하다"라고 제언했다.
한편 문 대통령은 산불 피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국가 차원의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6일에도 산불 피해가 극심한 경북 울진, 강원 삼척 일대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이번 선포는 강원 강릉과 동해까지 확대한 것이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8일 서면 브리핑에서 "이날 오전 문 대통령은 강릉시, 동해시에 대한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재가했다"며 "피해 수습, 복구 등 국가 차원의 지원에 나설 계획"이라고 전했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곳은 산불 피해 규모에 따라 주택 등 사유시설 및 공공시설의 피해 복구비 일부를 국비로 지원한다. 사유시설 복구비는 70%, 공공시설은 50%다. 또 정부는 피해 주민에 대해서도 생계 구호를 위한 생활안정지원금 지원과 함께 지방세 등 납부 유예, 공공요금 감면 등 간접지원도 추진할 방침이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