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세종=이준형 기자] "우크라이나 사태가 팬데믹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의 최대 리스크가 됐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내린 진단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생긴 충격파가 글로벌 경제 전방위로 번지고 있다는 의미다. 무디스는 대부분의 산업군이 우크라이나 사태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봤다. 제조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등 국내 주력산업은 물론 2차전지, 전기차 등 미래 핵심산업이 사정권에 들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핵심 주요 원자재의 공급망 현황을 심층 점검해 봤다.
가장 먼저 촉각을 곤두세운 건 반도체 업계다. 네온, 크립톤, 제논(크세논) 등 반도체 노광·식각 공정에 필요한 희귀가스 물량 상당 부분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의존하고 있어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이 수입한 네온 중 28%는 러시아(5%)와 우크라이나(23%)에서 들여왔다. 제논(러시아 31.3%, 우크라 17.8%)과 크립톤(러시아 17%, 우크라 31%) 의존도 역시 높았다.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은 3~4개월치의 희귀가스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반도체 업계가 우크라이나 사태 전 희귀가스 비축량을 평소보다 3~4배로 늘리며 수급 차질에 대응했지만 전쟁 이후 대체선을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높은 네온의 경우 러시아 미국 중국 프랑스도 생산하고 있지만 공급망 병목 현상이 심화되고 있어 원하는 만큼 재고를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포스코와 특수가스 전문업체 TEMC가 최근 네온가스 국산화에 성공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점이다. 올 하반기부터 본격 양산에 돌입한다. 단 생산능력은 국내 수요의 약 15%에 그친다. TEMC는 포스코와 함께 크립톤, 제논 국산화도 추진 중이지만 양산 시점은 불투명하다.
가격은 이미 오름세다. 네온가스 수입 가격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던 올 1월 t당 12만1964달러를 기록하며 지난해 평균치(5만8747달러)의 2배를 웃돌았다. 제논과 크립톤 수입 가격도 각각 83%, 52% 급증했다. 중국에서는 네온 현물 값이 올 초보다 65% 더 올랐다.
러시아군 폭격에 검은 연기 치솟는 우크라이나 저유소 (체르니하우 로이터=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북부 체르니하우에 있는 저유소가 러시아군의 폭격에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 러시아군은 침공 8일째인 이날 우크라이나의 완강한 저항에도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향해 전진하고 있으며, 제2의 도시 하르키우(하리코프)를 집중 공격 중이다. [우크라이나 국가비상대응청 제공] 2022.3.3 sungo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원본보기 아이콘2차전지 제조 원가의 50%를 차지하는 니켈과 알루미늄 값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러시아는 니켈, 알루미늄 모두 생산량 기준 3위의 자원부국이다.
니켈은 배터리 출력을 결정짓는 양극재 핵심 소재다. 전기차 보급 확산과 함께 니켈 몸값이 꾸준히 뛰고 있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기폭제가 됐다. 한국자원정보서비스에 따르면 지난 3일 니켈 가격은 t당 2만8800달러로 연초인 지난 1월4일(2만730달러)보다 39% 증가했다. 3년 전(1만3160달러)과 비교하면 2배 이상 뛰었다.
배터리팩 핵심소재인 알루미늄 가격은 지난 3일 기준 t당 3728.5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알루미늄 가격이 올 1월4일 2815.5달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불과 2달새 t당 가격이 1000달러 가까이 오른 셈이다.
배터리 업계의 원가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배터리 기업은 완성차 업체와 공급 계약을 맺을 때 통상 리튬, 니켈 등 양극재 주요 소재 가격을 배터리 납품가에 연동하는 조항을 넣는다. 하지만 알루미늄은 대부분의 연동 조항에서 제외된 소재다.
지난해 한국이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수입한 품목 나프타도 비상이다. ‘석유화학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는 원유를 정제하며 나오는 기초 원료로, 고무 섬유 플라스틱 등 소비재 생산에 쓰인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이 러시아에서 수입한 나프타는 43억8300만달러로 전체 러시아 수입품목의 25.3%를 차지했다.
문제는 나프타가 석유화학 제품 원가의 70%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나프타 수급 차질로 인한 파급효과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소비재로 번질 수 있다는 의미다. 나프타 가격은 우크라이나 사태 여파로 2008년 이후 14년 만에 t당 1000달러를 돌파했다. 지난 4일 나프타 선물 가격은 t당 1078.39달러로 올 1월3일(728.33달러) 대비 48% 급증했다.
석유화학 업계의 수익성 악화는 다음 수순이다. LG화학 , 롯데케미칼 등 나프타분해시설(NCC)을 갖춘 기업의 원가 부담은 나프타 가격에 비례한다.
철강업체들이 주목하는 원자재는 러시아 수입의존도가 약 35%에 이르는 페로실리콘이다. 이는 철강 제련 과정에서 불순물 제거나 쇳물 성분 조정시 사용하는 합금철이다. 페로실리콘 가격은 이미 전년 동기 대비 50% 이상 올랐다. 업계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추가 가격 상승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업체는 공급선 다변화에 나섰다. 전 세계 페로실리콘의 70%를 생산하는 중국 등에서 대체 조달하는 방안이다. 다만 중국산 페로실리콘은 러시아산보다 가격경쟁력이 낮다는 문제가 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페로실리콘은 대개 컨테이너선을 통해 수입한다"면서 "지난해부터 컨테이너선 운임이 올라 조달 비용도 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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