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고(故) 변희수 하사를 지지하는 지하철 광고가 최근 서울 이태원역에 게재됐다. 당초 이 광고는 지난해 8월 신청됐으나, 서울교통공사가 게재를 승인하지 않아 7개월 가까이 미뤄진 끝에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특히 교통공사가 광고를 승인하지 않은 이유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성전환 이후 부당한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야만 했던 고인을 추모하는 행동에조차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냐는 지적이 나온다.
◆심의 요청 3번 만에 승인된 故 변희수 하사 지하철역 광고
변 하사 추모 광고는 지난달 25일 이태원역 4번 출구 방면 벽면에 게재됐다. 화면 안에는 군복을 입은 변 하사의 얼굴과 함께 "변희수의 꿈과 용기, 잊지 않겠습니다", "2022년 2월27일은 故 변희수 하사 1주기입니다" 등 문구가 게재됐다.
이 광고는 군인권센터를 포함한 33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변희수 하사의 복직과 명예 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신청했다. 공대위는 지난달 28일 성명을 통해 "25일부터 이태원역에 변희수 하사 1주기 추모 광고를 게시했다"라고 밝혔다. 게시일은 광고가 걸린 날을 기준으로 약 한달이다.
변 하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하는 광고이지만, 이 광고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수개월가량의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당초 공대위는 지난해 8월9일 서울교통공사에 '변 하사의 복직 소송을 응원하는 광고'에 대한 심의를 요청했다. 그러나 교통공사는 약 한달 뒤인 같은해 9월2일 광고 게재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이후 공대위는 같은달 30일 재심의를 요청했지만, 이번에도 교통공사는 광고 게재를 불허했다.
공대위는 지난달 17일 교통공사에 광고 심의를 재요청했다. 세 번째 광고 심사 요청이었다. 교통공사는 나흘 뒤인 21일 외부광고심의위원회를 통해 심의를 개최해, 광고 승인을 게재했다. 첫 심의 요청 이후 실제로 지하철역에 광고가 걸리기까지 약 7개월가량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변 하사 광고 승인 걸림돌 된 교통공사 광고규정……인권위 "민주주의 원칙 훼손 우려"
그동안 교통공사가 광고 게재 허가를 불허한 이유는 '사회적 합의'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공대위는 교통공사의 불승인 결정이 '소수자 혐오·차별 행위'라는 취지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진정을 넣은 바 있다.
이후 인권위는 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 지난해 10월29일 광고 게재를 불허한 교통공사의 결정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자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라는 판단을 내렸다.
인권위 조사에 따르면, 서울 지하철에 게재되는 의견 광고는 9명 이내의 외부위원으로 구성된 교통공사 광고심의위원회가 독립적으로 심의한다. 광고심의위는 처음 찬성 3인·반대 5인으로 광고 신청을 불허했고, 재심의에서도 찬성 4인·반대 5인으로 최종 불허했다.
반대 의견을 낸 심의위원들은 공사 광고규정인 '체크리스트 평가표'를 근거로 내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의견이 대립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정체성과 관련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 "소송 중인 사건으로 공사의 정치적 중립성 방해" 등을 이유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이 광고는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 등이 관련된 게 아니라 전역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소송"이라며 "행정 당국과의 소송에 연관된 광고를 게재한다고 해서 곧바로 공사의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광고규정인 '체크리스트 평가표'에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를 광고금지 사유로 두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사회적 소수 집단의 의견은 사실상 제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며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훼손할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평가표에서 이런 항목들을 삭제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전문가 "사회적 합의,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의무 있어"
시민들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성소수자 지지 광고를 게재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20대 대학생 A씨는 "변 하사 사건에서도 보였듯이 성소수자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차별, 선입견에 시달리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그런 약자들의 목소리를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틀어막는 것은 사실상 차별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회사원 B씨(31)는 "사회적 합의가 부족해서 포괄적 차별금지법도 수년째 국회에서 막히고, 사회적 합의가 부족해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는 건가"라며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성소수자를 지우는 일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된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시민단체도 비판을 이어갔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은 지난달 27일 서울 신촌 유플렉스 광장에서 열린 변 하사 1주기 추모 행사에 참석한 자리에서 "변 하사를 추모하는 지하철 광고는 이태원역 4번출구 인근을 시작으로 다음주부터는 신촌역과 시청역에도 설치된다"라며 "이 과정에서 서울교통공사가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거부했던 전적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꼬집었다.
공대위는 지난달 28일 보도자료를 내고 "늦었지만, 광고 게시가 이루어진 점은 환영하나, 7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며 시민들의 추모하는 마음까지 합의의 대상으로 만들어 온 반인권적 업무 처리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라며 "낮은 인권 감수성에 대한 반성과 시정을 위한 근본적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전문가는 국가 기관들이 사회적 합의를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은 "국가는 성별이나 신체의 상태, 성정체성 등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할 의무가 있다"라며 "사회적 합의가 갈등 요소가 된다면, 국가 기관들이 먼저 나서서 시민 사회가 합의를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소극적인 모습으로 일관하는 것은 오히려 책임의 방기에 가까울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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