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표류' 차별금지법…새해엔 결실 맺을 수 있을까

지난 2007년 참여 정부 말기 첫 입법예고
보수 기독교계 강력 반발…'성적 지향' 조항 문제
이후 수차례 입법 시도 됐으나 번번이 좌절
인권단체 "성소수자, 사회서 일상적으로 차별 받아"
"차별금지법이 인권 침해 해소 가능하다"

지난 2019년 서울광장에서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 / 사진=연합뉴스

지난 2019년 서울광장에서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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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2022년 임인년(壬寅年)이 시작되면서 국내에서 '차별금지법' 입법이 시도된 지도 어느덧 15년째에 접어들었다. 성별, 장애, 나이, 성적 지향 등에 따른 고용·교육상의 차별을 방지하는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은 그동안 격렬한 찬반 논란에 휩싸이면서 끝내 통과되지 못했다.


인권단체들은 이제 정치권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국회에 계류돼 있는 동안 수많은 국내 성소수자들이 고통받아왔으며, 여론도 차별금지법 제정 찬성으로 기울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올해로 15년째 국회 문 두드리는 차별금지법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해는 지난 2007년 12월, 참여정부 말기다. 당시 정부는 법무부를 통해 '차별금지법안' 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국회의 문을 제대로 두드리기도 전에 일부 기독교계를 비롯한 보수 단체의 강력한 반발로 좌절됐다.


문제가 된 내용은 법안 내에 있는 차별금지 대상이었다. 당시 법무부는 병력, 학력, 출신 국가와 민족, 성적 지향 등 20개 차별금지조항을 설정했는데, 이 가운데 기독교계는 성적 지향 항목을 문제 삼았다. 일부 기독교 단체는 이 법안을 두고 '동성애 합법화 법안'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기독교계는 차별금지법 입법에 반대하기 위해 교수 반대 서명, 유관 단체들의 반대 의견 팩스 보내기 운동 등을 벌였다. '동성애 차별금지법안 저지 의회선교연합'이 결성돼 기자 회견을 열고 성적 지향 항목 삭제를 촉구하기도 했다.


인권운동 활동가들이 지난해 11월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위한 평등길 걷기' 도보 행진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인권운동 활동가들이 지난해 11월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위한 평등길 걷기' 도보 행진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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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음 해인 2008년 '성적 지향', '학력' 등 7가지 차별금지 사유가 삭제됐으나, 이마저도 당시 17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후로도 차별금지법 입법 시도는 꾸준히 이뤄졌다. 지난 2011년, 2012년에는 각각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 등 진보 정당을 중심으로 차별금지법이 발의됐다. 2013년에는 김한길·최원식 당시 민주통합당 의원들이 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이들 역시 차례대로 국회 회기 만료로 폐기되거나 철회 수순을 밟았다.


이번 21대 국회에서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차별금지법안'을 포함한 관련 법안이 4건 발의됐다. 또 지난해 6월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시민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 회부됐다. 그러나 법사위는 이 청원의 심사 기일을 21대 국회 임기 마지막 날인 오는 2024년 5월29일로 연장하는 데 의결했다.


"나중에", "국민적 합의 있어야" 정치권도 미온적 태도


정치권의 미온적인 태도 또한 차별금지법 제정이 번번이 좌절해 온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이 있다. 종교계 표심의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입법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한 바 있지만, 2017년 대선 때는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공약을 거둬들였다. 선거 운동 기간 중 한 성소수자 여성에게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십니까"라는 항의를 듣자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리겠다"라고 답변을 유보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난 2017년 4월26일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천군만마 국방안보 1천인 지지선언 기자회견에 참석, 인사말을 하는 도중 성소수자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 사진=연합뉴스

지난 2017년 4월26일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천군만마 국방안보 1천인 지지선언 기자회견에 참석, 인사말을 하는 도중 성소수자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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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25일 국가인권위원회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자리에서 "차별 금지에 관한 기본법을 만드는 게 우리가 인권선진국이 되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 할 자세"라며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언급을 했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임기를 불과 수개월 남긴 상태에서 지나치게 늦은 처사라는 비판이 나왔다.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는 당시 "이제서야 차별금지법을 띄우는 더블플레이는 뭔가. 버리기는 아깝고 실제 추진하는 싫은 '계륵'인가"라고 꼬집기도 했다.


20대 대선을 준비하는 거대 양당 후보들 또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해 11월 한국교회총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차별금지법은 충분한 논의를 통해 국민적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며 "일방통행식 처리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같은 달 광주 조선대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차별금지법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충분히 사회적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라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지난해 12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라며 유보적인 의견을 내놨다. 윤 후보는 "(차별금지법은)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헌법에서 보장하는 자유와 평등을 어떻게 조화해야 하느냐에 관한 문제"라며 "평등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라고 설명했다.


"차별금지법이 성소수자 기본권 침해 해소할 수 있어" 인권단체 촉구


인권단체들은 정치권의 이같은 태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국회에 발이 묶인 사이, 실제 성소수자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2020년 1월 군의 강제 전역 조치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거수경례하는 변희수 전 하사의 모습 / 사진=연합뉴스

지난 2020년 1월 군의 강제 전역 조치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거수경례하는 변희수 전 하사의 모습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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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중 성전환(성확정) 수술을 받은 뒤 강제 전역처분을 받은 변희수 전 하사가 대표적 사례다. 변 전 하사는 지난 2019년 11월 휴가를 이용해 외국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입국했다. 군에 복귀한 변 전 하사는 여군으로 계속 복무하길 희망했지만, 군은 전역심사위원회를 열고 "군인사법 등 관계 법령상 기준에 따라 계속 복무할 수 없는 사유에 해당한다"며 전역을 결정했다.


이후 변 전 하사는 전역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인사소청을 냈으나 군은 기각 결정을 내렸다. 결국 변 전 하사 측은 법원에 전역 처분 취소 행정소송을 냈다. 그러나 첫 변론을 앞두고 있던 지난해 3월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 관련, 시민단체 '무지개인권연대'의 배진교 대표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트랜스젠더는 상점을 이용하거나 보험, 은행, 관공서, 병원, 임대차계약 등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며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국가는 차별금지법을 통해 이를 해소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여론도 찬성 의견이 압도적 다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6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국민인식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88.5%는 차별 금지 법률 제정 방안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 중 73.6%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국민 10명 중 9명 가까운 이들이 차별금지법에 찬성한 셈이다.


전문가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더욱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초석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장은 "차별금지법은 특정한 차별 행위에 대한 형사 처벌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정체성에 따라 차별을 하면 안 된다고 국가에서 규정을 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예를 들어 여성이나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폭력적으로 대하는 행위는 나쁘다는 인식은 이미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고, 이에 대한 처벌 조항도 마련돼 있다. 하지만 성소수자에 대해서는 법안은 커녕 그런 인식조차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실정"이라며 "만일 10년, 15년 전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됐더라면 지금쯤 한국이 더욱 포용적인 사회가 됐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차별금지법은 성적 지향 등에 따른 차별도 나쁜 행위임을 인지하고, 좀 더 모든 정체성에 친화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기초 초석을 마련하는 법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며 조속한 입법을 촉구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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