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의 영화읽기]비상식을 상식으로 바꾼 남자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홍준표 감독이 말하는 전태일 열사
노동환경 예전보다 좋아졌지만 해결해야할 문제 여전히 많아
전태일은 상식 강조했던 사람 "지금의 갈등도 그 틀에서 이뤄져야"

영화 '태일이' 스틸 컷

영화 '태일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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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운동의 시발점은 전태일이다. 성장만 보고 달렸던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의로운 희생에 사람들은 용기를 냈다. 대학생이 주도한 개발독재 거부 투쟁에 노동자, 종교인 등이 합세했다. 이듬해 정치계도 호응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정희와 김대중이 최초로 노동 환경 개선에 관한 공약을 내걸었다.


동조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난 이유는 뭘까. 단서는 전태일의 유서에 있다.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 일부인 나." 개선 의지는 삶과 노동의 순환 속에서 다양한 변화로 상속됐다. 삶을 외쳤던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은 그 순간 모순을 뛰어넘었다.

영화 '태일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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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낱같은 의미의 고리는 이미 1995년 박광수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다뤄졌다. 마지막 장면에서 한 청년이 전태일 평전을 손에 든 채 거리를 지나간다. 얼굴은 전태일(홍경인)을 빼닮았다. 제2, 제3의 전태일이 존재한다는 암시다. 지난 1일 개봉한 홍준표 감독의 애니메이션 ‘태일이’도 방향은 비슷하다. 전태일을 소박한 꿈과 행복을 좇는 사람으로 조명한다. 가족처럼 친근하게 그려 열사라는 수식에서 비롯한 괴리를 최소화한다. 열악한 노동 환경을 모두의 문제로 인식시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한다.


반세기 전 외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여전히 직종, 계약 형태, 사업장 규모에 따른 차별이 존재한다.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가 대표적인 예. 근로시간, 연차휴가, 연장근로 부당해고구제 등의 권리가 없다. 사업자가 서류상 사업장을 나누는 등 편법으로 악용한다. 입증하려면 장기간 고비용의 소송이 불가피하다. 홍준표 감독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홍준표 감독[사진=명필름 제공]

홍준표 감독[사진=명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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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전태일인가.

"애니메이션 연출을 제안받고 떠올린 질문이다. 전태일이 꿈꿨던 세상이 펼쳐졌다면 굳이 다룰 필요가 없다. 전반적인 노동 환경은 분명 좋아졌다. 하지만 전태일의 이름은 계속 울려 퍼진다. 해결할 문제들이 여전히 많다.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뿐만이 아니다. 예술 분야에선 아직도 단기 고용 시 계약서 작성을 생략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실존 인물 조명이라서 어려움이 컸을 텐데.

"열사라서 더 그랬다. 잘못 표현하면 당시 사건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지적을 받을 게 뻔했다. 사실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전태일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상상력을 가미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일기나 메모장의 말투와 화법을 토대로 대사를 쓰고 알맞은 정서를 부여하는 식이었다. 평화시장 등 주요 공간도 당시 사진이나 영상을 근거로 표현했다. 청계 고가도로의 경우 시점에 맞게 공사 경과까지 정확하게 묘사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달리 분신 장면을 간소화했다. 바스트 샷으로 짧게 비추고는 익스트림 와이드 샷으로 거리를 뒀다. 석유를 뿌리는 모습 등도 생략했고.

"그날을 강조하고 싶지 않았다. 몸에 불이 붙는 순간보다 이전 과정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전태일이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불을 붙였는지가 핵심이니까. 그렇다고 아예 건너뛸 수는 없었다. 평화시장 사람들이 놀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계기 정도로 나타냈다."


영화 '태일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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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열사보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전태일의 키워드는 크게 세 가지다. 열사, 분신, 근로기준법. 하나같이 우리와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그는 ‘태일이’라는 제목처럼 평범한 청년이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처럼 그려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공감할 여지도 커진다고 봤고. 분신도 비슷하게 접근했다. 통상 죽음을 떠올리나 새로운 정신의 시작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그게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논할 수 없다."


-분신하는 얼굴에 나타나는 굳센 의지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되던데.

"맞다. 괴로워하는 표정보다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이미지로 구현되길 바랐다. 불씨는 작은 외침과 같다. 모두 함께 소리쳐야 노동 환경이 개선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친근한 묘사에 집중해서인지 주체성과 능동성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보다 덜하다.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한없이 여리고 착하니까. 때로는 어리숙하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더 대단한 면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위로할 수 있는 인물이 세상을 바꾸어놓은 것 아닌가. 누구든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범함은 평범함 속에서 자라는 법이다."


영화 '태일이' 스틸 컷

영화 '태일이'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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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문제를 다룬 대중영화에는 일종의 공식이 있다. 노동자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다가 부당한 문제로 감정 변화를 유도해 공분을 유도하는 전개다. ‘태일이’는 이 틀에서 살짝 벗어난 듯 보이는데.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모호해서다. 악인으로 규정한 캐릭터가 없다. 못되게 구는 사람도 남모를 사정이 있다. 태일이는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혔을 거다. 숨 막히고 참담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근래 노동 문제는 복잡하다. 젊은 층은 취업 문제로, 기업은 잦은 이탈로 골머리를 앓는다. 정년 연장을 두고 세대 간 갈등도 첨예하다. 다시 조명되는 전태일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달라진 노동 환경에 맞게 개선해보자고 손을 건네지 않을까. 그는 상식을 강조했던 사람이다.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갈등을 불식하고 공감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테니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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