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서구 탄방동 S아파트에 전세로 살던 A씨는 지난 6월 집주인으로부터 "딸이 실거주해야 하니 8월초 계약만료 때까지 집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A씨는 갑작스러운 실거주 통보에 다소 비싼 가격으로 부랴부랴 새 이삿집을 구했다. 하지만 최근 이삿날을 앞두고 집주인이 "실거주를 못하게 됐다"고 말을 바꾸며 "50만원을 줄테니 손해배상 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써달라"고 요구했다. 이 단지의 전셋값은 2년 사이 약 5000만원 올랐다. A씨는 분통이 터졌지만 보증금을 돌려받아 새집에 들어가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합의서에 사인을 했다. 그는 "처음부터 집주인이 실거주 의사가 없었던 것 같아도 세입자로선 소송을 하지 않는 한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11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 등 새 임대차법이 시행된지 1년이 지났지만 일선 주택 임대차 시장은 여전히 각종 꼼수와 갈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개정안이 안착돼 전월세 시장도 안정을 찾을 것이란 정부의 공언과 달리 집주인과 세입자간 불신과 법적 소송만 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 접수된 임대차 관련 전체 상담 건수는 지난해 1~7월 5290건에서 법 시행 후인 지난해 8월~올해 6월 7293건으로 37.9% 늘었다. 특히 전세 기간을 2년 더 연장하는 계약갱신청구권을 놓고 집주인과 세입자간 갈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갱신청구권을 무력화하는 집주인의 실거주 요건을 둘러싼 법의 사각지대가 크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처럼 집주인이 실거주를 하겠다고 했다가 막판에 이를 번복해도 이미 다른 전셋집을 구해놓은 세입자는 이사를 물리기 힘들다. 세입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지만 막상 소송을 진행하기 쉽지 않고, 한다고 해도 들어가는 시간·비용 대비 실익이 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임대인으로선 최악의 경우 배상 책임을 물더라도 새 세입자를 받아 시세대로 임대료를 높이는게 더 큰 이익이니 합의서를 요구해 소송 의지를 꺾거나 "할테면 하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사례가 많다.
엄정숙 부동산전문 변호사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하지 않는다는 약정을 맺어도 임대차 관계가 종료되기 전에 쓴 합의서라면 임차인에게 불리한 것이니 무효로 봐 손해배상을 받을 수도 있다"며 "다만 집주인측이 실거주를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다른 세입자를 들인 것이라면 책임이 없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세입자가 계약갱신청구권의 허점을 파고들어 규정을 무력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온라인 상에서는 "집주인이 실거주를 이유로 계약갱신청구권 행사를 거부해도 계약 만기 이후까지 나가지 말고 버터야 한다"는 해법도 돈다. 집주인이 보증금 인상 목적으로 거짓으로 실거주하겠다고 한 것이면 명도 소송을 하지 못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실제 소송을 걸었을 때 집을 비워주면 된다는 설명이다. 한 세입자는 "법을 곧이 곧대로 다 지키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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