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승진 기자] "답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답은 사라진다. 나는 무관하다고 말하는 순간 답은 없어진다."
왕진 의사인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의 저자 양창모는 강원도 춘천의 시골 마을 곳곳을 누빈다. 그는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와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아니 알았지만 모른 체 외면해온 세상과 마주한다. 우리 사회가 답이 없다고 등 돌린 세상 속으로 저자는 발을 들였다.
그 속에는 질병이 아닌 사람이 있다. 저자가 만난 손 할아버지는 의사와 단 3분간 마주하기 위해 엉덩이를 끌면서 집에 있는 문턱이란 문턱은 다 깎아놓았다. 저자는 진료실에서 보지 못한 세상을 왕진으로 마주하며 끊임없이 반성하고 성찰한다. 그리고 그의 반성은 사회를 향한 일침으로 돌아온다.
저자는 왕진이라는 경험으로 ‘진료실 너머’에 관한 기록을 풀어낸다.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는 여든의 노인이 고작 멀미 때문에 몇 년째 병원도 못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하지만 높은 고개 너머 실타래처럼 구불구불한 길에서 속이 울렁거려 차를 잠시 세우고 나서야 이해하게 된다.
굳어진 무릎 관절 탓에 몇 년간 바깥 구경을 한 번도 못한 할머니의 골방. 숯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지린내를 없앤다며 자식들이 갖다 놓은 것이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상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삶의 맥락 속에 놓여 있는 환자를 의사는 그저 모니터 안의 차트가 전해주는 ‘질환’으로 치환한다.
저자의 왕진 경험이 많아질수록 우리나라 의사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은 더 적나라해진다. 약을 많이 처방할수록 수익이 느는 시스템은 약으로 생긴 부작용을 약으로 치료하려 애쓴다. 약 처방이 반복된 끝에 환자는 10여개의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 관절염 환자에게는 생활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의사의 한마디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의사는 더 독한 약 처방만 이어갈 뿐이다.
저자는 자조한다. "진료실에서 나는 환자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질환과 마주한다. (…)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곳에서 살고 무엇을 하는지와 같은 삶의 맥락은 진료실에 들어온 순간 모두 사라진다. 모든 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증상’만 남는다."
저자가 꼬집는 의료 시스템 문제는 우리 사회와 닮았다. 부작용을 또 다른 부작용으로 덮기에 급급한 우리 사회는 어느 새 ‘증상’만 남겼다.
내 몸 하나 누일 곳 없다는 주거 난민들의 울부짖음에서 시작된 부동산 정책. 정책이 정책을 덮어가며 문제의 시작점은 잊히고 강남 아파트가 하루아침에 몇 억원이나 올랐다는 이야기만 남았다. 약자를 위한다며 수십, 수백건씩 쏟아내는 국회의원들의 각종 공약 속에서도 환자들의 삶은 없고 처방전과 부작용조차 알 수 없는 약봉지만 남았다.
저자는 아픈 사람이 움직일 때 통증 부위에 온 신경을 집중하듯 사회가 변화의 방향을 정할 때 그 사회의 가장 아픈 곳부터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무통 주사가 처방된 사회다. 무통 주사는 통증을 없애는 주사가 아니라 통증이 대뇌에 전달되는 경로를 차단하는 주사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통증이 차단된 사회일 뿐이다.
결국 사회적 통증이 차단된 사회에서 역할을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닌 이웃이다. 저자는 환자와 의사라는 경계선을 넘지 않기 위해 애쓴 자신에 대해 참회한다. 스스럼없이 선을 넘어 환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최 간호사의 모습. 저자는 최 간호사를 통해 반성하고 ‘무통 사회’에 대한 해답도 찾아 나선다.
모니터링 기계와 시액제, 산소 호흡기와 위장 흡입관으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줄들을 몸에 걸고 누워 있는 환자.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저 높은 곳에서 가느다란 거미줄 하나에 온몸을 싣고 이 세상의 어둠 속으로 내려온 한 마리 거미와 같다. 가는 줄들이 씨줄과 날줄로 서로 이어져 아름다운 연대의 그물망이 만들어지면 난 한 마리 거미처럼 내 한 몸 그 위에 놓고 바람 찬 세상을 견딜 수 있으리라."
저자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못하고 있는 일을 해내는 한 사람의 평범한 이웃이 되자고 촉구한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 양창모 지음 / 한겨레출판사 /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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