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일본 정치에서 예외적인 측면이 많다. 이전까지 자민당 역사에서 무파벌 출신이 총리가 된 적은 없다. 갑작스러운 총리 사임으로 관방장관이 총리에 오른 예도 없다. 도시 출신 의원인데 지방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스가 총리가 탄생할 수 있던 배경으로는 파벌 연합체인 자민당의 종언, 관료 주도에서 관저 주도로의 전환, 도쿄 집중에 대한 지방의 반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위기 의식 등의 요인을 들 수 있다.
스가 총리는 아베 신조 전 총리와 달리 철저한 리얼리스트다. 이데올로기나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무사상의 소유자다. 자민당 사상 계보에는 아베 전 총리로 상징되는 강한 보수의 '세와카이'와 기시다 후미오 전 간사장으로 이어지는 리버럴 계열의 '고치카이'라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그 중간에 '이익추구형'의 다케시타파가 존재한다. 스가 총리는 이런 자민당 파벌의 이념 성향과는 다른 철저한 실무파다.
스가 총리의 장점으로는 용단(결단)과 참을성(인내)을 가진 '냉철한 리얼리스트'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 예로 1998년 포스트 하시모토 류타로 총재선거 당시 스가 의원은 꽃길을 마다하고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지지함으로써 의리와 용기를 지닌 정치가로 이름을 알렸다. 2012년 총재선거에서도 아베 전 총리를 지지해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스가 총리는 한번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해내는 사람으로 정말 끈기가 있다"는 일본 나가타초(정치권)의 평은 스가 총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리얼리스트인 스가 총리가 한일 관계 개선에도 현실 감각을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안타깝게도 '아베 전 총리는 신념 때문에, 스가 총리는 전략적이어서 한일 관계는 어렵다'라는 말이 맞아가고 있다. 현재 스가 총리의 우선순위는 국내 정책이다. 성공적인 코로나19 사태 대응을 통해 정치적 지지를 높이는 것이다. 또 선거를 통해 정권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의욕도 강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스가 총리는 국내 정책에서는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내세우지만 외교 분야에서는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특히 최초 총리 기자회견에서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아 정책 우선순위가 낮다는 것을 보여줬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과의 전화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도 '지금까지의 원칙을 고수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스가 정권의 대한(對韓) 외교는 한국의 대응에 따라 반응하는 '수동형 외교'가 되기 쉽다. 또는 일본의 정국에 따라 스가 총리가 국내 보수층의 결집과 정권 기반 강화를 우선해 강경론을 고집할 수도 있다. 당분간 스가 총리가 한일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일 관계 개선은 일본의 변화에만 기대를 걸어선 안 된다. 한국의 선택에 따라 한일 관계의 방향도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제부터는 문재인 정부의 선택이 중요하다. 첫 번째 선택은 스가 총리의 탄생을 한일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아 한국이 강제징용 손해배상 해법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에서 '제2의 문희상'안을 제안해 한일 정부 간 교섭에 물꼬를 트는 것도 방법이다. 일본도 한국의 노력에 맞춰 타협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선택은 소극적인 한일 관계 관리 정책이다. 당장은 한일 관계 악화를 막는 한일 정상 간 대화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연내에 예정돼 있는 한ㆍ중ㆍ일 정상회담의 개최를 계기로 한일 정상 간 실질적인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 또 청와대와 일본 관저도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세 번째 선택은 현상 유지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한일 관계 관리에 실패해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방향이다. 지금이라도 문재인 정부는 한일 관계에 위기 의식을 갖고 대일 정책에 감정보다는 전략적 접근을 해야 한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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