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종일 기자] 최근 우리 사회에서 기본소득 도입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서울 서초구(구청장 조은희)가 국내 최초로 ‘청년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사회정책 실험’을 실시한다.
이는 청년기본소득을 본격 시행하기에 앞서 정책효과를 미리 확인하는 예비실험 성격으로, 서초구는 지난 6월부터 진행한 연구용역을 바탕으로 ‘청년기본소득 사회정책실험’의 기본설계를 한 뒤 관련 조례 개정안을 구의회에 제출했다고 6일 밝혔다.
정책실험의 근거가 되는 조례안이 통과되면 내년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간다.
현재 국내에서 기본소득 정책에 관한 체계적 검증을 통해 도입 여부와 효과를 사전에 분석한 사례는 전무하다.
이번 서초구의 정책실험은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는 기본소득 정책에 대해 일선 현장에서 체계적 검증을 실시하는 국내 첫 사례로 사전 효과분석을 통해 예산낭비와 시행착오를 막는 ‘사회정책의 예비타당성 조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또 기본소득에 관한 소모적 논쟁 대신 과학적 토론을 이끄는 것은 물론 실현가능, 지속가능한 실행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청년정책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청년기본소득 정책실험 주요 내용
서초구에서 2021년부터 시행하는 사회정책실험은 조사집단과 비교집단으로 나눠 진행하며, 두 그룹 간의 상호 분석을 통해 청년기본소득이 고용, 생활방식, 심리 등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검증할 계획이다.
먼저 서초구청 홈페이지를 통해 1년 이상 서초구 거주 만 24~29세 청년 1000명을 모집해 두 개 집단으로 나누고, 300명은 조사 집단으로 선정해 2년 동안 매달 1인 가구 생계급여에 준하는 금액(2020년 기준 월 52만원)을 지급, 700명은 비교집단으로 아무런 지원을 받지 않게 된다.
이들에 대해 2년간에 걸친 온라인 서베이와 심층면접을 통해 정기적으로 구직활동, 건강과 식생활, 결혼과 출산 등 사회적 인식과 태도 등을 조사함으로써 청년기본소득이 청년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분석, 종합적으로 평가할 계획이다. 특히 국내 최초로 개발된 기본소득 모니터링 앱을 통해 실험기간의 변화 추이를 누구나 확인할 수 있도록 제공할 예정이다.
◇왜 청년들을 대상으로 정책실험을 하나?
서초구가 기본소득 실험을 청년들을 대상으로 우선 실시하는 것은 최근 코로나19 재난 속에서 가장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 계층이 ‘청년층’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취약 계층은 연령대를 기준으로 보면 노인,아동,청년, 그리고 성별로는 여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현재 노인과 아동에게는 노령연금과 아동수당 등 기본소득과 유사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으나, 청년에게는 이러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기존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안 그래도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N포 세대’로 불리는 이 시대 청년들은 지금 코로나19로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마저 사라져 좌절하고 있다. 청년 체감실업률이 26.8%로 역대 최고치라는 통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번에 서초구가 정책실험을 하는 것은 ‘청년기본소득’이 대한민국의 미래 동력인 청년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희망을 선사하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초구 사회정책실험 설계 특징
서초구의 이번 프로젝트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속적(24개월)이면서도 공정하고(무조건적, 보편적, 소득구분 없음) 과감한 금액(52만원)을 지급하는 것이 특징이다.
첫째, 기본소득 지급대상은 24~29세 청년으로 소득구분과 관계없이 무조건 선정한 것은 첫 직장을 찾게 되는 나이가 남자 26~28세, 여자 23~25세가 가장 많은 점을 감안한 것이다.
둘째, 기본소득 지원금액을 ‘1인 가구 생계급여 수준(2020년 기준 월52만원)으로 했다. 기본소득은 청년들의 안정된 구직활동을 지원하고, 경제적 안정이 가능한 수준이어야 하므로 최저생계비와 같은 규모가 돼야 한다. 이를 반영한 서초구의 지원금액은 현재 경기도의 청년기본소득이 1년간 100만원, 서울시의 청년수당이 6개월 간 300만원인 것과 달리 대폭 상향 조정됐다.
셋째, 기본소득 지급기간을 2년으로 설정한 것은 기본소득이 개인의 삶의 행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감안해 장기간으로 정한 것으로,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기간이 2년으로 진행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서초구의 시도는 ‘청년기본소득’과 같은 대규모 사회정책도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선 현장에서 과학적 실증을 거쳐야 한다는 실사구시 정신에 기반한다. 대규모 개발사업에 앞서 정부가 예비타당성조사를 실시하듯이 아무리 취지가 좋은 정책이라도 과학적 증거에 기반해야 예산낭비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또 정책수행에 들어가는 막대한 재원은 국민이 피땀 흘려 내는 세금으로 충당되고, 한번 시행하면 되돌리기 어렵다는 점에서 반드시 철저한 사전 검증이 필요하다.
서초구는 이번 프로젝트에 소요되는 연 22억 원 가량 비용을 연례적 사업이나 각종 행사성 경비와 소모성 경상경비 축소 등을 통해 절감한 알뜰 예산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경기도 청년기본소득’과 다른 서초구 과학적 사전검증
서초구의 이 같은 과학적 접근방식은 경기도의 청년기본소득 추진방식과 크게 달라 대조를 이룬다. 경기도는 만 24세만을 대상으로 분기에 25만원씩 총 100만 원을 지급하는 ‘부분적 청년기본소득 정책’을 실행해오고 있다. 이는 매년 1500여억 원의 예산이 들어가는 대형 투자사업을 예비타당성 조사도 없이 최고 결정권자의 지시 하나만으로 실행한 셈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반면에 서초구의 청년기본소득 사회정책실험은 전문기관의 용역에 따라 사전 설계돼 추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실증 자료를 확보한 뒤 이에 근거해 정책의 전면 확대 내지 부분 시행 여부를 판단한다는 점에서 경기도와 대비된다.
◇그간 준비과정 및 향후계획
서초구는 코로나19 장기화로 청년 실업률이 급증하던 지난 6월 ‘한국대통령학연구소 기본소득센터(센터장 연세대 이삼열 교수)’에 연구용역을 의뢰, 지난 9월에 제출된 내용을 바탕으로 정책실험의 기본 설계를 구성했다.
이삼열 교수는 “서초구의 실험목표는 단기적으로 청년들의 안정된 구직활동 지원을 통한 성공적인 구직이 가능한가, 삶의 균형회복에 도움이 되는가, 심리적 안정감 여부이며, 중장기적으로는 사회구조 양극화 완화, 결혼 및 출산율 증가에 도움이 되는지 밝히는데 있다”고 설명했다.
향후 자문으로 참여하는 이승윤 중앙대 교수는 “무소득이든, 중산층이든 청년들이 각각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 2년 동안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꾸준히 축적할 경우 청년기본소득의 실시여부와 관계없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향후 서초구는 10월15일을 시작으로 청년기본소득 사회정책실험을 위한 정책토론회와 설명회를 올해 안에 두 차례 개최함으로써 청년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주민, 전문가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청년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지방자치단체나 시민사회단체에서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함께 논의가 가능한 ‘열린 정책실험’으로 진행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아울러 서초구는 정책실험을 더욱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진행해 나가기 위해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사회정책실험 운영위원회’도 구성한다. 운영위원회에서는 지급 인원과 금액 등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실험에 따른 효과, 부작용, 정책적 보완사항을 종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청년기본소득’의 도입 또는 확대 여부에 대한 사회적 합의 기반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서초구의회는 지난달 18일 허은 의원(더불어민주당)·최원준 의원(국민의 힘)이 ‘서초구 청년기본조례 일부개정 조례안’을 공동 발의해 지난달 23일 입법예고를 마쳤다.(민주당 5명, 국민의힘 1명, 무소속 1명 등 7명이 찬성) 그러나 일부 의원을 중심으로 실험 대상자 수가 많고, 예산이 과다하다는 문제 제기가 있어 집행부인 구는 이런 내용들을 조정ㆍ반영한 조례 개정안을 지난달 29일에 의회에 제출했다.
조은희 서초구청장은 “요즘 코로나19로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마저 사라져 청년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심정”이라며 “사회 진입에 힘겨워하는 청년들에게 공정한 기회의 사다리를 놓아 주는 것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또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과학적인 검증에 기반을 둔 지속가능한 ‘청년기본소득’ 정책을 마련해 실효성과 지속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며 “다른 지자체나 시민사회단체에도 실험에 동참해 효과나 부작용을 함께 검증함으로써 사회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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