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딸깍발이] 부끄러운 한국군 위안부의 기억

한국전 당시 국군 위안부 시설…일본군의 성범죄 예방 논리 닮아
창설 국군 장교 대다수 일제때 군인…반인권·반평화적 문화 이식
승리·자본·남성 중심 역사 산물…올바른 한일관계 위해 자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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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지난 5월 대학로에서 극단 신세계의 연극 '공주들'을 관람했다. 제40회 서울연극제 공식 선정작 열 편 가운데 하나였다. 극의 주인공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던 할머니였다.


가장 놀라운 장면은 한국전쟁을 묘사하는 대목.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도 군인들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군인들은 일제시대 일본군과 똑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에 이어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의 삶을 살았다고 한탄했다. 한국군 위안부? 충격적이었다.

'그곳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의 저자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 교수도 책에서 1996년 경험한 비슷한 충격을 털어놓는다.


"강원도 속초, 소위 '아바이마을'에서 수행한 현지 조사는 나에게 판도라상자의 뚜껑을 열게 되는 계기가 됐다. (중략) 그 가운데 나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의 하나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 내에 '위안부'와 군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곳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는 김 교수가 부끄러운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쓴 책이다. 김 교수가 이 논쟁적인 문제에 대해 다루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고 올바른 한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함이다.

그는 자기성찰에 기반한 한일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불법성과 허위성으로 가득한 한일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으며 1965년 한일협정 같은 갈등을 야기하는 불행한 사태가 초래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사실 위안부가 현실화한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는 우리부터 올바른 한일 관계 정립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일본군 위안부를 사실로 인정하게 한 결정적 사건은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고발이었다. 이전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사회적으로 크게 공론화하지 못했다. 학계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를 밝힌 논문은 1998년 8월에야 나왔다. 초중고교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역사적 사실로 제대로 교육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이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근대 국가의 기록이 지배집단의 기록이자 승리자의 기록, 엘리트의 기록, 자본의 기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남성, 제국주의자, 식민주의 지배집단, 자본가, 점령군, 냉전 주도 세력의 기록이라는 성격도 띠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일제로부터 해방됐으나 일제의 집단기억, 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 삶의 양식조차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제대로 된 성찰 없이 묻히거나 논쟁을 불러오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한국군 위안부도 그 사례로 볼 수 있다.


1948년 출범한 국군의 주력, 특히 장교의 대다수는 일제의 침략 전쟁 중 군에 복무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제 군대에서 배운 것들을 체계적으로 국군에 이식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은 해방 후 그 제도가 얼마나 문제 있고 반인권적ㆍ반평화적인지 깨달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 폐해는 한국전쟁에서 나타났다.


논쟁적인 주제이기에 김 교수가 자기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은 치밀하다. 방대한 자료를 살피고 당시 살았던 많은 어르신의 생생한 구술 내용도 실었다.


대한민국 육군이 1965년 펴낸 '육·이오사변 후방전사: 인사편'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특수위안대, 즉 한국군 위안부 제도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이다. 특수위안대가 설치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사기 양양은 물론 전쟁 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대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래왕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 특수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군이 위안시설을 설치하면서 내세운 '절제할 수 없는 성욕과 성범죄 예방'이라는 이유와 별 차이가 없다.


특수위안대는 서울에 3개 소대(중구 초동·중구 충무로·성동구 신당동), 강원 강릉에 1개 소대가 설치됐다.


김 교수는 2002년 학술회의에서 '후방전사'에 있는 한국군 위안부 관련 내용을 공개했다. 하지만 이후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는 이 책을 이용하지 못하게 했다. 지금은 국회도서관 소장본도 이용불가 자료로 분류돼 있는 상태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와 인터뷰해 당시 한국군이 민간인 여성들에게 가한 폭력에 대해 입증해낸다. 속초의 'ㄱ'씨 할머니는 김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들려줬다.


"밤마다 국방군(국군)들이 젊은 여성들을 겁탈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이웃 마을에서부터 돌았다. (중략) 처녀뿐만 아니라 과부들도 군인들에게 겁탈당했다. 특히 과부집은 남편이 월북한 빨갱이 가족이니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는 핑계로 무사출입이었다. (중략) 얼굴 고운 옥춘이는 당하는 게 무서워 거지처럼, '미친년'처럼 꾸미기도 했다."


김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나라 근대 역사가 엘리트의 기록, 자본의 기록, 냉전 주도 세력의 기록이라면 우리 스스로 뼈저리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김 교수는 "이 책을 통해 한국의 지배층에게 '책임'을 말해주고 싶다"고 밝혔다.


(김귀옥 지음/선인)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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