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전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요즘에는 한글을 제대로 쓰고 말하는 것이 어렵다. 한국문화가 좋아, K팝이 좋아 유학 온 외국의 젊은이들보다, 나이 든 나 같은 사람들은 분명 우리말인데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종종 있다. '시선 강탈'이라는 의미의 줄임말 '시강'이라든지, '일과 나의 개인적 삶의 균형'이라는 의미의 영어 '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의 줄임말인 '워라밸'이라든지, "안 물어 보았고, 안 궁금하다"는 의미의 줄임말인 '안물안궁'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마도 긴 글자를 읽기 싫어하고, 문자메시지로 의사를 빨리 전달하려는 문자메시지(SMS)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선호하는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런 문제를 진진하게 거론하는 나를 그들은 '진지한 벌레(?)'라는 의미의 '진지충'이라 부를 것이다.
대학에서 '국어'도 가르쳤지만 나는 국어학자는 아니다. 문학인일 뿐이다. 그러나 한글로 창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 하면 국어학자들은 이런 말들이 널리 차용되고 보편화될 때 그것들을 표준국어사전에 올리는 문제에 고심해야 하고 시대를 반영하는 문학작품 속에서도 이런 언어들이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 다. 언어는 그 시대를 반영한다. 상용되는 언어이든 아니면 신조어든 속어이든 언어는 당대를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글쓰는 사람은 알아야 한다.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 나는 K팝이 좋아서 유학 온 지 2년이 된다는 외국 젊은이의 말에서 '덕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나는 '덕후(德厚)하다'라는 한자어로 생각했다. 형용사로서 '후덕하다'라는 동의어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御宅)'를 우리말 발음인 '오덕후'를 줄인말이라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1970년대 일본에서 생겨난 단어인 '오타쿠'로 긍정적 의미로는 한 분야에 깊이 있게 빠진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를 의의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과거에는 게임에 빠져 집에서 나오지도 않고 사교성도 없고 본업에 충실하지 못한 게임마니아를 의미했는데, 이제는 시장 트렌드를 음지에서 혹은 양지에서도 주도하는 전문가를 '덕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덕질, 입덕, 성덕, 덕심, 덕력 등의 신조어가 만들어졌고, 심지어는 '덕후'와 '커밍아웃'이 합쳐진 말로, 어떤 분야의 덕후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을 '덕밍아웃'이라는 말로, 덕질이 직업이 된 것을 '덕업일치'라는 말로 표현한다고 한다. 새로운 말들이 생겨난 것이다. 계속해서 신조어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언어 현상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부추기고 심지어는 이를 이용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드는 매스컴도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하는 시인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마술사라는 의미도 바뀌어야 할 판이다. 한편으로는 시인이 언어의 마술사 되기를 포기하고 이런 말들을 선호하는 그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하나 하는 의혹도 갖게 된다. 이미 자격을 잃은 지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서 나는 요즘 우리말을 새롭게 배우려 한다. 모르는 말이 너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제4차 산업의 언어도 배워야 하지만, 정보화시대의 언어들이 분화 발전되어 파생된 언어도 많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 우리말인데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려운 우리말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새삼 이방인이고 외계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유한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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