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란 긴 이름을 유행에 맞춰 '알쓸신잡'이라 줄인 제목의 예능 프로가 인기입니다.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정해진 주제 없이 지식의 내공을 수다처럼 늘어놓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책과 술을 좋아하는 선배 한 분이 있습니다. 이 프로에 출연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요. 술자리에서 꺼낸 사소한 소재는 지식과 철학으로 살이 붙어 훌륭한 안주로 변합니다. 어느 날 술자리 분위기가 무르익자 선배가 무언가를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주더군요. 이 선배는 술에 취하면 소지품을 나눠주는 특이한 술버릇이 있습니다. 그때 가방에서 우연찮게 만년필이 나왔습니다. 바로 이어진 만년필에 대한 그의 지식은 덤이었죠. 애정이 없었다면 만년필에 대해서 그런 많은 상식은 없었을 겁니다. 만년필 종류별 필기감에 대한 그의 경험은 깊었습니다. 세상에는 '문구 성애자'가 많지만 유독 만년필에 대해서 그 정도가 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저도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유는 만년필 펜촉이 원고지 위를 지나가며 만들어내는 독특한 소리때문입니다. 펜촉에 가해진 압력으로 금속과 종이가 마찰을 하며 잉크가 종이에 흘러드는 소리를 온몸의 감각으로 예민하게 느낍니다.
그 소리는 만년필에 숨어있는 과학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이제 만년필 애호가 답게 그 숨은 과학에 대한 '알쓸신잡'을 풀어볼까 합니다. 만년필의 펜촉을 '닙(nib)'이라 부릅니다. 만년필에서 '닙'은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잉크를 방출하는 '닙'에는 공학적으로 '기다란 홈'과 '구멍'이 있는데 이를 통해 모세관 현상으로 잉크가 종이로 전달됩니다. 그리고 잉크와 종이 성질에 따라 증발과 흡수작용으로 종이 위에 선이 생깁니다. 최근에는 과학자들이 잉크와 같은 연성물질의 운동에 대해서도 연구를 합니다. 여기에도 만년필의 '닙'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같은 필기구지만 연필은 다른 원리입니다. 연필은 식물성 섬유가 겹겹이 포개진 종이 표면의 틈새로 흑연 덩어리에서 밀려 떨어진 얇은 조각들이 붙는 작용입니다. 하지만 만년필은 '닙'을 타고 흘러내린 잉크가 종이 깊이 방향의 미세한 공간으로 침투해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에 의해 자국이 생깁니다. 그래서 종이가 잉크를 빨리 흡수해 번지지 않고 바로 마르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만년필 애호가는 종이까지 같이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닙' 모양과 재질은 만년필 역사 그 자체입니다. '닙'은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비스듬하게 자른 갈대줄기의 끝부분에 기다란 홈을 만들고, 그 틈으로 잉크가 올라가는 모세관 현상을 응용해 탄생합니다. 그다음 이것의 재질이 깃털로 바뀌고, 다시 금속이 대신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닙'의 형태는 19세기 중반에 나왔지요. 이 후 1884년 미국인 워터맨이 '닙'에다 잉크통을 달아 만년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타자기라는 새로운 도구가 세상에 나왔고, 만년필은 사람들에게 별 호응을 얻지 못합니다. 마치 요즘 노트북 때문에 펜이 설 자리가 줄어든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만년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생긴 사건이 생깁니다. 1941년 케네스 파커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제품인 '파커 51'을 세상에 선보인 겁니다. 그런데 이 제품의 출시 초기에는 '닙' 끝의 종이와 직접 맞닿는 '팁'을 금으로 만들어 필기감은 부드럽지만 무른 금속인 까닭에 변형이 심해서 쉽게 망가졌습니다. '팁'은 펜촉 끝에 덧씌우는 둥근 모양 금속입니다. 결국 연구 끝에 재질을 이리듐과 오스뮴의 합금인 오스미리듐으로 개선합니다. 요즘은 '닙' 몸체를 주로 금과 스테인리스, 또는 티타늄이나 팔라듐으로 사용하고 종이와 맞닿는 '팁'은 마모성이 적은 백금족 합금원소를 사용합니다. 오스뮴이나 이리듐은 원소 자체가 희귀해서 대체 물질이 필요했고, 새롭게 찾아낸 것이 '루테늄(Ru)'입니다. 루테늄은 아주 단단하고 은백색을 띠는 금속입니다. 현대 주기율표에서 백금을 포함한 6개 원소가 있습니다. 주기율표의 8, 9, 10족에 속하고 5주기와 6주기에 있는 원소들을 통틀어 백금족 원소라 합니다. 루테늄도 이 백금족 원소의 하나입니다.
원소 사냥을 통해 주기율표 빈 칸이 채워졌을 시기에는 루테늄 발견도 전쟁을 치릅니다. 1700년대 중반 백금이 원소로 확인되고, 이후 백금 광석에서 팔라듐, 로듐, 오스뮴, 이리듐이 발견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루테늄뿐이었는데 여러 과학자가 자신들이 최초 발견자라고 주장합니다. 그 여러 후보자 중에 결국 러시아 화학자인 클라우스가 원소의 학명에 자신의 모국인 러시아의 라틴어명 '루테니아'를 따서 '루테늄'이라 명명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대개 클라우스를 최초 발견자로 인정하지만 여기에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합니다.
모든 금속 '닙'에는 덧씌우는 또 다른 금속이 있습니다. '닙'은 표면에 코팅이 되어 녹슬지 않는 것뿐입니다. 덧씌우는 금속이 없으면 '닙'은 종이와의 마찰로 코팅막이 닳고 잉크와 화학반응으로 부식됩니다. 사실 고가의 만년필이 훌륭한 제품이지만, 보통 만년필도 기능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싶은 만년필'인 파커나 몽블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날 만년필은 기록을 위한 도구이기보다는 소장하고 신분을 과시하는 용도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평소에 사용하는 보급형 만년필조차 비록 '닙'은 스테인레스 합금이지만 '팁'은 백금류 금속이며 기능적으로는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
파커 만년필이 유행했던 시절에 특별한 잉크가 있었습니다. 잉크는 빨리 마르는 것이 생명입니다. 빨리 마르는 데는 종이뿐만 아니라 잉크 자체의 물성도 중요합니다. 빨리 마르는 잉크라는 뜻의 '큉크Quink(Quick dry Ink)'라는 상표의 제품이 있습니다. 빨리 마르도록 잉크 용매에 알코올을 첨가한 겁니다. 잉크의 색을 결정하는 것은 염료인데 이 경우에는 염료가 용제에 완전히 녹아 있지요. 그래서 발색은 좋지만 염료가 종이 섬유 깊숙이 침투하기 때문에 번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또 만년필 애호가들이 특별하게 취급하는 '블루블랙 잉크'가 있습니다. 처음 쓸 때는 푸른빛인데 시간이 지나면 검게 변하는 잉크입니다. 잉크의 주 원료는 바로 철(Fe)입니다. 전자 2개를 잃은 2가인 철 이온이 종이의 섬유질에 스며들어 다시 산소와 결합하고 전자를 하나 더 빼앗겨서 3가 철 이온이 됩니다. 이때 잉크 안의 '타닌'과 결합을 하면 검은색을 띠게 됩니다. 이 떫은맛을 내는 타닌을 얻기 위해 너도밤나무과 식물에 생기는 벌레의 혹인 '몰식자'에서 타닌을 추출해서 '몰식자 잉크'라고도 했습니다. 이 잉크가 마르면 태양광에 의한 탈색이 적고 내수성이 좋아 오래도록 보존이 됩니다. 요즘 컴퓨터의 대용량 저장장치에 비해 원시적인 2차원 저장장치인 종이에 기록된 문서가 더 오래 보존되는 이유입니다.
이런 만년필 지식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딱히 쓸데없어 보이지만, 세상에 쓸모없는 지식은 없습니다. 미래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창의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런 쓸데없을 것 같은 근거들에다 인문학적 시각과 논리와 같은 지식이 붙고, 거기에 예술적인 혼이 입혀지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바로 미래의 본질입니다.
제가 중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쓰시던 파커 만년필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 뒤로 교과서와 공책 여백에는 만년필로 그렸던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지금은 그 만년필도, 그 잉크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만년필에 대한 사랑이 생긴 이유가 특별한 소리 보다 잃어버린 추억과 유품에 대한 갈증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나 갖지 못하는 걸 가지고 있다는 소중함을 뒤늦게 알게 된 겁니다. 누군가에게 만년필은 이야기를 쓰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저처럼 그 자체가 이야기인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만년필을 사용하는 이유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일 겁니다. 선배가 술에 취해 쓰던 만년필을 나눠주고 그 잡학 지식을 내놓는 것은 그의 공감을 전달하는 것이고, 이것이 모여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겁니다. 이렇게 만년필은 그 이름처럼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와 사랑의 중심에 있는 필기구로 남을 겁니다.
김병민 과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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