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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바뀐 자리 : 가해자와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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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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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자리는 자주 뒤바뀐다.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 피해를 입은 걸그룹 출신 여성이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한때 연인으로 가장 내밀한 언어를 나누다 협박범이 되는 사례는 빈번하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주변 분들의 성원과 도움으로' 헤어숍을 연다고 발표했다. 재판 증인 출석을 앞두고 피해자가 얼마나 큰 압박감에 시달렸을까. 그가 깨어나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오면 좋겠다. 그런데 그 힘은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데이트 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두려움에 떠는 쪽은 늘 피해자다. 맞을까, 맞은 게 세상에 알려질까 무서워 떤다. 권력형 성폭행 피해를 입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 비참함을 알리고자 했던 고(故) 장자연의 경우는 또 어떤가.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으로 뒤늦게나마 가해자 리스트가 밝혀지나 했더니 결국 규명 불가로 결정이 났다. '성범죄'나 '부실/조작 수사'에 대해 공소시효 만료나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더는 조사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억울함은 영원히 봉인될 참이다.

'인권'이란 그럴싸한 이유 앞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자리는 자주 바뀐다. 살인 사건, 성폭행 사건, 권력형 폭력 사건 등에서 피해자의 신상이 세세히 언론에 도배될 때, 가해자는 두툼한 마스크에 챙 넓은 모자를 쓴 채 언론 앞에서 누구를 특정하지 않고 '죄송합니다' 중얼거린다. 학교 폭력의 어린 피해자들은 또 어떤가. 소심하고 여린 마음에 제대로 응대를 못 한 아이는 세상의 무관심과 고통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는데, 죽고 나서는 또래 집단 내에서 사회 부적응자로 손쉽게 자리매김된다. 어떤 조직에서 정의를 위해 나서서 타협을 버티어내는 양심은 관심종자나 박덕(薄德)으로 매도당하기 일쑤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백한 사건에서조차 입장이 뒤바뀌기 쉬운데, 하물며 차분히 진실을 가려야 하는 일에선 더 난망하다. "알고 보니 양쪽 다 일리가 있더라." "그 사람도 살아야 하니 좀 봐주라." 점잖은 화평을 앞세운 양비론 앞에서 조용한 피해자는 용서를 하지 못하는 속 좁은 인간이 된다. 힘없는 피해자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사과하도록 강요받고,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이해를 강요받는다. 책임감의 무게와 수치심의 정도에 따라서 죄의 무게도 바뀐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돈과 권력을 내세워 떵떵거리는 목소리와 그런 권력에 눈감는 언론이나 여론, 일반의 무관심이 만나 수많은 죄가 덮이고 새로운 죄가 탄생한다.


한 여성의 노브라가 48시간 동안 실검 1위를 한 나라에서 한 젊은 청년은 전봇대에서 일하다 떨어져 죽는다. 매해 300명이라 한다. "장비가 문제가 아니라 죽은 사람이 실수해서 그래"란 말은 다시 피해자에게 책임을 씌운다. "어지간하면 참아, 문제 만들지 말고. 좋은 게 좋은 거지"란 말을 습관처럼 흘리는 우리. 자기만 잘하면 된다는 각자도생의 생존법칙을 새기며 사는 우리. 약한 이들을 보듬는 공동의 삶에 눈감는 안일과 방기 속에서 오늘도 수많은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음 같은 고통을 지난다.

진실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검찰만 공범이 아니라 겁 많고 귀찮은 우리 모두가 공범이다. 이 자각이 구체적인 연대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 수많은 억울한 피해자가 죽음이 아닌 생존의 문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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